유럽이 그려가는 자주국방의 꿈, 15억 유로 국방 펀드로 시작되는 새로운 안보 질서

유럽연합(EU)이 회원국 간 치열한 논의 끝에 15억 유로 규모의 새로운 국방 투자 펀드 조성에 합의했다. ‘European Defence Industrial Programme(EDIP)’로 명명된 이 펀드는 단순한 예산 증액을 넘어서 유럽이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 안보 체계를 구축하려는 전략적 의지의 표현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트럼프 행정부의 NATO 부담 증대 요구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유럽은 마침내 ‘유럽산 우선’이라는 깃발을 들고 자주국방의 길로 나서고 있다.

1년간의 갈등 끝에 이뤄진 역사적 합의

EU 회원국들이 15억 유로 국방 투자 펀드 조성에 합의하기까지는 무려 1년 이상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가장 큰 쟁점은 ‘유럽산 우선 조달’ 원칙의 강도였다. 프랑스는 유럽 방산업체 보호를 위해 엄격한 ‘바이 유러피안(Buy European)’ 규정을 주장했지만, 네덜란드를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미국, 영국 등 제3국으로부터의 무기 구매에도 유연성을 허용해야 한다고 맞섰다.

최종 합의안은 절충적 성격을 띤다. 이 펀드로 지원받는 방산 장비의 경우 최소 65%는 EU 또는 연관국에서 생산된 부품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부과되었다. 일부 예외 조항은 있지만, 이는 유럽 방산업체들에게 상당한 보호막을 제공하는 수준이다.

흥미롭게도 일부 국가들은 이 비율조차 “너무 제한적”이라고 불만을 표했다. 이들은 공동 성명을 통해 “유럽 방산업계가 여전히 단기·중기적으로 동맹국, 특히 대서양 건너편 파트너들의 핵심 부품, 기술, 노하우에 의존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도 “유럽 영토와 이익에 대한 긴급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며 협상 개시를 막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더 큰 그림: 8000억 유로 유럽 재무장 계획의 일환

15억 유로 펀드는 EU가 추진하는 훨씬 거대한 재무장 계획의 한 부분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 3월 ‘REARM Europe Plan’이라고 명명된 종합 국방 강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향후 4년간 최소 8000억 유로(약 1229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동원해 유럽의 국방력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EU가 1500억 유로 규모의 공동 차입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회원국들에게 저리로 대출을 제공해 국방 투자를 촉진하겠다는 구상이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회원국들이 평균적으로 GDP 대비 1.5%포인트 국방비를 증액한다면 4년간 6500억 유로의 추가 재정 여력을 창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EU 27개 회원국 중 NATO에 속한 23개국의 국방비 평균은 GDP 대비 1.99% 수준이다. 1.5%포인트가 증액되면 평균 3.5% 수준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이는 향후 NATO 정상회의에서 국방비 목표가 현행 2%에서 3% 이상으로 상향될 가능성을 대비한 선제적 조치로 해석된다.

유럽국방펀드, 이미 54억 유로 투입한 성과

사실 EU의 국방 투자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유럽국방펀드(EDF)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21년 출범 이후 지금까지 54억 유로가 투입되어 EU 집행위원회는 유럽 국방 R&D 분야의 주요 투자자로 자리잡았다.

2025년 EDF 사업계획만으로도 10억 6500만 유로가 배정되어 협력적 국방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지상전투, 우주, 공중전투, 에너지 회복력, 환경 전환 등 핵심 분야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으며, 중소기업과 중견기업 지원을 위한 EU 국방혁신제도(EUDIS)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우크라이나 기업들이 처음으로 EDF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AI 기반 무인항공시스템을 개발하는 우크라이나의 ‘Small UAS’ 프로젝트가 대표적 사례다. 이는 EU가 우크라이나를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닌 유럽 안보 체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투자은행의 역할 확대와 19개국의 공동 요청

EU의 국방 투자 확대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기관이 바로 유럽투자은행(EIB)이다.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19개 EU 회원국은 최근 공동 서한을 통해 EIB가 방산업계 대출을 대폭 확대해달라고 요청했다.

현재 EIB는 탄약, 무기, 군사장비 생산에 직접 자금을 지원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위성, 드론, 레이더 시스템과 같은 이중용도(dual-use) 제품에는 대출이 가능하며, 작년에 보안 프로젝트 대출을 10억 유로로 두 배 늘렸고 올해는 20억 유로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EU 집행위원회는 향후 10년간 EU 국방 부문에 5000억 유로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EIB는 5000억 유로가 넘는 대차대조표를 보유한 세계 최대 다자간 금융기관이자 대출기관으로, 국방 분야 투자 확대의 핵심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핀란드를 비롯한 19개국은 EIB에 금지 활동 목록을 재검토하고 국방채권 발행을 고려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이들은 “금융시장과 신용평가기관과 협의하여 현재 EIB 채권의 자금조달 비용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신중한 접근을 당부했다.

‘1500억 유로 SAFE 펀드’ 원칙적 합의 달성

더 큰 규모의 합의도 이뤄졌다. EU 회원국들은 5월 ‘Security Action for Europe(SAFE)’라고 명명된 1500억 유로 규모의 국방 펀드 조성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 펀드는 공동 차입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고, EU 회원국과 우크라이나 같은 특정 국가들에게 국방력 강화와 유럽 방산업계 육성을 위한 대출을 제공한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7500억 유로 규모의 ‘차세대 EU’ 복구기금과 유사한 방식이다. EU가 공동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회원국에 대출 형태로 지원하는 구조다. 국방 분야에서 이런 규모의 공동 차입이 논의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민간 투자 유치와 네덜란드 연금펀드의 선례

EU의 국방 투자 확대는 민간 부문에서도 호응을 얻고 있다. 네덜란드 최대 연금운용사인 ABP의 CEO 코엔 뷔이스터는 향후 5년간 유럽 방산업체 등 위험자산에 약 1000억 유로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5440억 유로의 자산을 보유한 ABP는 이미 방산업체에 약 20억 유로를 투자한 상태다.

뷔이스터 CEO는 “네덜란드 펀드가 유럽 대륙의 방위 이니셔티브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가 미국과 중국을 따라잡기 위해 매년 8000억 유로의 투자 증대를 EU에 촉구한 상황과 맞물려 있다.

흥미롭게도 기존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프레임워크에 따라 독일 라인메탈,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같은 방산업체를 포트폴리오에서 제외했던 펀드들도 최근 입장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일부 연금 투자자들은 무기 제조업체에 대한 투자가 민주주의 방어에 중요해졌다고 주장하며 국방 제외 조항 완화를 검토하고 있다.

유럽 방산업계의 새로운 기회와 도전

EU의 대규모 국방 투자는 유럽 방산업계에 거대한 기회를 제공한다. 유럽 최대 자산운용사인 아문디(Amundi)는 유럽 대륙 전역의 군사비 지출 급증을 예상하며 방산업체 연계 유럽 ETF의 여름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의 1140억 달러 규모 펀드매니저 반에크(VanEck)도 유사한 투자 상품 출시를 검토 중이다.

하지만 도전도 만만치 않다. ‘Buy European’ 정책으로 인해 미국, 영국 등 전통적 파트너들과의 협력에 제약이 생길 수 있고, 기술력 격차 해소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한 회원국 간 이해관계 차이로 인한 갈등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시대, 유럽 안보의 새로운 전환점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NATO 회원국들에게 국방비 증액을 압박하고 있다. 이는 수십 년간 미국의 보호에 의존해온 유럽에게 근본적인 전략 재검토를 강요하고 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우리는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재무장의 시대에 있으며, 유럽은 국방비를 대규모로 늘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유럽이 안보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미래를 향한 도전: 독립과 협력의 균형

EU의 15억 유로 국방 펀드 조성 합의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제 유럽은 미국과의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독자적 안보 역량을 구축해야 하는 복잡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러시아의 위협이 현실화된 상황에서 유럽산 무기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에 따라 유럽의 안보 전략도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 현재 EU는 2025년까지 5000명 규모의 신속대응군 창설을 추진하고 있으며, 첫 임무는 우크라이나 휴전 보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유럽의 자주국방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15억 유로라는 숫자 뒤에는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독립적 안보 체계를 구축하려는 유럽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것이 성공할지는 결국 유럽이 얼마나 단결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수십 년간 이어져온 유럽 통합의 진정한 시험대가 바로 안보 분야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