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무역 질서가 요동치는 가운데, 유럽연합(EU)과 중국 간의 7월 정상회담을 앞두고 희토류 접근성 강화가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으로 촉발된 무역전쟁의 여파 속에서, EU는 중국이 쥐고 있는 희토류 공급망의 열쇠를 얻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공세에 나서고 있다.
희토류 수출 제한으로 곤경에 빠진 유럽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는 이미 유럽 제조업계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다. 지난 4월 중국이 미국의 고율 관세에 대응해 희토류 수출 허가를 늦추는 방식으로 통제에 나선 이후, 유럽 자동차업계는 부품 조달 차질과 생산 지연 우려에 직면했다.
특히 5월 중국의 희토류 자석 수출량은 전년 동월 대비 74% 감소한 1200톤에 그쳤다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분석은 중국이 희토류를 얼마나 강력한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인 2020년 2월 이후 가장 적은 수치다.
중국 상무부가 지난달 EU 기업을 대상으로 희토류 수출 허가를 신속히 처리하는 ‘패스트트랙’을 도입했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전체 신청 건수의 절반 이상이 처리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EU는 중국에 희토류 수출 허가 부여 기간 연장이나 수출 물량에 대한 허가제 철폐를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7월 베이징 정상회담, 희토류가 최우선 과제
오는 7월 24~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EU-중국 정상회담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리창 총리와 만나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에 대한 EU 입장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번 정상회담은 EU-중국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변화한 국제 정세 속에서 양측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EU와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희토류 문제에서 어느 정도 양보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의 강력한 반발과 딜레마
하지만 중국의 반응은 여전히 강경하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지난 16일 G7 정상회의에서 “중국이 희토류 분야의 주도권을 전략적으로 무기화하고 있다”고 지적하자, EU 주재 중국 사절단은 즉각 “사실을 무시하고 편향적이며, 전형적인 이중잣대”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중국 측은 “중국의 산업 보조금 정책은 개방성과 공정성, 법률 준수 원칙에 기반하고 있으며, WTO 규정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중국의 산업 발전은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고 기술 혁신과 완비된 산업 공급망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도 내부적으로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미국과의 관세전쟁이 격화되면서 EU와의 관계 개선이 절실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EU를 대미 견제 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EU의 전략적 계산
EU 입장에서도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동안 중국산 전기차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의료기기 공공조달을 금지하는 등 강경 정책을 펼쳐왔지만, 트럼프의 관세 정책으로 국제무역 환경이 불안해지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EU는 미국의 보편 관세 정책으로 자칫 중국과 함께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EU의 경제 안보에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EU도 쉽게 양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EU는 7월 정상회담을 앞두고 고위급 경제·통상 대화를 전격 거부했다. 무역갈등 해결을 위한 진전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EU 고위 관계자는 “중국은 대화를 원하지만, 모든 의제에서 전혀 진전이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핵심 이슈
희토류 문제는 단순한 무역 이슈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공급의 90%를 차지하고 있어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이는 전기차, 반도체, 풍력발전 등 첨단 산업의 핵심 소재인 희토류의 공급을 중국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유럽 입장에서는 탈탄소 정책과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희토류 확보가 필수적이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와 풍력발전기에 들어가는 희토류 자석 없이는 EU의 그린딜 정책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한국에게도 중요한 변수
이런 EU-중국 간의 희토류 협상은 한국에게도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한국 역시 중국산 희토류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EU가 중국으로부터 희토류 공급 우선권을 확보한다면, 한국 기업들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EU가 중국과의 협상에서 성과를 거둔다면, 이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중국과의 희토류 협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선례가 될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첨단 제조업 비중이 높은 국가들에게는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될 것이다.
결과를 좌우할 변수들
7월 정상회담의 성패를 좌우할 변수는 여러 가지다. 우선 미중 무역전쟁의 향방이 중요하다. 트럼프가 중국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한다면, 중국은 EU와의 관계 개선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또한 EU 내부의 대중국 정책 조율도 관건이다. 독일 같은 경우 중국과의 경제적 유대가 깊어 강경 정책에 소극적인 반면,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내부 의견 차이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따라 협상력이 달라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전략적 판단이 중요하다. 중국이 희토류를 장기적인 협상 카드로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단기적인 관계 개선을 위해 양보할 것인지에 따라 협상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번 EU-중국 정상회담은 앞으로의 글로벌 희토류 공급망 구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희토류를 둘러싼 이 거대한 게임에서 EU가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 그리고 중국이 어떻게 응수할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