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나토 동부 국경 국가들이 단순한 군사 방어를 넘어 ‘전시 사회 체계’ 전환에 돌입하고 있다. 특히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폴란드 등은 의료 체계를 중심으로 전시 대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는 민간 생존 기반 구축이라는 전략적 차원의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전쟁은 언젠가 온다”는 전제 아래
리투아니아에서는 최근 ‘아이언 울프(Iron Wolf)’ 훈련이 진행됐는데, 이 훈련에서 의료진들은 우크라이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화상, 총상, 파편 상처 환자들에 대한 치료와 야전 조건에서의 절단 수술을 연습했다. 동시에 응급 서비스 요원들은 혼란과 혼돈 상황에서의 업무를 훈련했다.
에스토니아는 구급차 승무원을 위한 헬멧과 방탄복을 적극적으로 구매하고 있다. 의료기관의 지하실을 수술실로 개조하고, 통신, 전력, 급수 중단에 대비해 발전기를 구매하고 있으며, 병원에는 위성 터미널과 자율 생명 유지 시스템을 설치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특수 의료장비, 정형외과 및 외과 키트에 2500만 유로를 투자할 계획이며, 시민 대피와 난민 수용 계획도 동시에 수립하고 있다.
폴란드 역시 국경지대 병원들에 공습 대비 지침을 하달하고, 평시 운영과 별도로 전시 의료 라인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모두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을 단지 ‘가능성’이 아닌 ‘시간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보건위원회 부국장 라그나르 바이크네메츠는 “문제는 러시아가 공격할지 여부가 아니라 언제 공격할지다”라고 단언했다.
아이언 울프 훈련: 병원도 참여하는 국가 전체의 대응
리투아니아에서 최근 실시된 ‘아이언 울프(Iron Wolf) 2025-I’ 대규모 훈련에는 약 3,700명의 군인이 참가했다. 이 훈련의 특별한 점은 단순 군사력뿐 아니라 학교, 병원, 소방서, 행정기관까지 포함된 민·군 합동 훈련이라는 것이다.
훈련에서는 대량 부상자 발생 상황을 가정해 실전처럼 반복 훈련했다. 베라루스 국경에서 50km 떨어진 빌뉴스 대학교 산타로스 클리닉은 지하 수술실, 대피소, 자율 생명 유지 시스템 구축을 일상 업무의 일부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훈련은 기존의 군사 중심 안보 개념을 넘어 ‘총력전 사회화’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전쟁이 발생할 경우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과 모든 사회 기반 시설이 즉시 대응 가능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새로운 안보 전략: 총체적 ‘레질리언스’ 구축
동유럽 국가들의 대응은 단순한 군사 방어 차원을 넘어선다. 핵심은 시민 보호와 사회 기능 유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안보 개념이다. 이른바 ‘레질리언스(resilience)’ 전략은 단순히 위기 후 회복을 넘어,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조차 사회 기능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는 체계를 말한다.
노르웨이 전문가 비외른 굴드보그에 따르면, 군사 충돌 시에는 병원의 표준 운영 대비 3-5배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기존 의료 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러한 개념은 나토 내부에서도 주목받고 있으며, 동부 전선 국가들이 실질적인 실험대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는 NATO 본부와의 협력을 통해 보건-안보-기반시설 대응을 통합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현실적 제약과 과제
하지만 이런 준비에도 현실적 한계가 있다. 발트 3국에서는 평상시 교대 근무에도 의료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며, 폴리티코가 인용한 조사에 따르면 리투아니아 의사 4명 중 1명은 전쟁 발발 시 단순히 도망갈 것이라고 답했다.
집중치료병상 부족 문제도 특히 우려스럽다. 많은 동유럽 건물들이 소비에트 시대의 유산으로 특히 취약한 상태다.
정치적 차원의 의미
폴란드는 2025년 상반기 EU 이사회 의장국으로서 EU 보건 시스템의 대규모 군사 충돌 대비를 주요 의제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동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라 EU 전체의 안보 전략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부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 국가의 정치 엘리트들에게 전쟁 아이디어는 편리한 배경이 된다. 더 많은 자금을 요청하고, 브뤼셀로부터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하며, 내부 실패를 ‘동방의 위협’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동유럽은 지금 ‘전쟁은 일어날 수 있다’가 아니라 ‘전쟁은 언제든 일어난다’는 명제 아래 움직이고 있다. 이들의 대응은 단지 러시아 견제를 위한 방어선 구축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 사회 전체를 군사화하지 않으면서도, 군사적 충격에 견딜 수 있는 사회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전쟁은 이제 단지 군대의 몫이 아니라, 병원, 학교, 시청, 모든 시민의 몫이 되고 있다.
이 변화는 한국을 포함한 다른 분단국, 국경 분쟁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에게도 깊은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 역시 단순한 군사적 대비를 넘어 사회 전체의 회복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안보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