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의 안보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70년 넘게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상대적 평화를 누려온 유럽이 갑작스럽게 현실적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유럽연합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기치 아래 독자적 방위 능력 구축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NATO 중심의 대서양 동맹 강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접근은 유럽 안보의 미래를 둘러싼 근본적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다.
전략적 자율성 담론의 등장과 발전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 개념은 2016년 EU 글로벌 전략 문서에서 처음 공식 등장했다. 당시에는 주로 외교정책 영역에서 미국과 다른 독자적 노선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와 아프가니스탄 철수, 그리고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이 개념은 군사·안보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 개념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다. 그는 2017년부터 “유럽인의 운명을 유럽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며 유럽군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특히 2019년 NATO를 “뇌사 상태”라고 표현하며 유럽의 독자적 방위력 구축을 촉구한 바 있다.
독일 역시 과거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전략적 자율성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슐츠 총리는 2022년 ‘시대적 전환점(Zeitenwende)’ 선언을 통해 독일의 안보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공식화했다. 1000억 유로 규모의 특별 국방 기금 조성과 GDP 대비 국방비 2% 목표 달성 약속이 그 구체적 표현이다.
EU 방위산업 정책의 새로운 전개
전략적 자율성 추진의 핵심은 독자적 방위산업 능력 구축이다. EU는 2017년 유럽방위기금(European Defence Fund, EDF) 설립을 통해 방위산업 협력의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 2021-2027년 예산 기간 동안 총 79억 유로가 배정되어 있으며, 이는 EU 차원에서 방위산업에 직접 투자하는 첫 번째 사례다.
유럽방위기금의 주요 목표는 방위 연구개발 촉진과 공동 조달 사업 지원이다. 차세대 전투기(FCAS), 유럽 전차 시스템(MGCS), 해상 감시 시스템 등 대규모 공동 프로젝트들이 이 기금의 지원을 받고 있다. 특히 프랑스-독일-스페인이 공동 개발 중인 차세대 전투기 사업은 총 1000억 유로 규모로 유럽 방위산업 협력의 상징적 프로젝트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 프로젝트들은 상당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각국의 서로 다른 군사 요구사항과 산업 정책, 그리고 기술 수준의 격차가 협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차세대 전투기 사업의 경우 독일과 프랑스 간 주도권 경쟁으로 인해 개발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공동방위펀드와 재정 조달 메커니즘
EU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방위 투자 확대를 위한 새로운 재정 메커니즘 구축에 나섰다. 2022년 도입된 유럽평화기구(European Peace Facility, EPF)는 총 120억 유로 규모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과 아프리카 등 제3국 안보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
더 나아가 EU는 방위 투자를 위한 공동 차입 메커니즘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차세대 EU 기금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방위 분야에서도 유사한 공동 채권 발행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재정 주권을 둘러싼 민감한 문제로, 독일과 네덜란드 등 재정 보수국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다.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EU 차원의 보조금 정책도 강화되고 있다. 2023년 도입된 방위산업 강화법(Defence Industry Reinforcement through Common Procurement Act, DIRPA)은 회원국들의 공동 조달을 장려하기 위해 최대 25%의 EU 보조금을 지원한다. 이는 미국산 무기 도입보다는 유럽산 무기 공동 구매를 유도하려는 정책적 의도를 담고 있다.
NATO 재활성화와 대서양 동맹 강화
전략적 자율성 추구와 동시에, EU 회원국들은 NATO 중심의 대서양 동맹 강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러시아 위협의 현실화로 인해 미국의 안보 보장이 여전히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핀란드와 스웨덴의 NATO 가입이다. 200년간 중립을 유지해온 스웨덴과 냉전 시대에도 중립적 자세를 견지했던 핀란드가 러시아 침공 직후 NATO 가입을 신청한 것은 유럽 안보 지형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한다. 핀란드는 2023년 4월 정식 가입했고, 스웨덴도 터키의 승인을 거쳐 2024년 가입을 완료했다.
기존 NATO 회원국들의 국방비 증액도 가속화되고 있다. NATO는 회원국들의 GDP 대비 국방비 2% 지출을 권고해왔지만, 2014년 이후에도 이를 달성한 국가는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주요국들이 2% 목표 달성을 공약했고,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3%를 넘어서고 있다.
미국 의존도를 둘러싼 복잡한 현실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는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 축소를 목표로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유럽이 미국 없이 독자적 방위가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특히 핵 억지력과 정보·감시·정찰(ISR) 능력, 전략적 수송 능력 등에서 유럽은 여전히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이러한 의존도가 명확히 드러났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에서 미국이 전체의 60% 이상을 담당했고, 실시간 정보 제공과 위성 통신 지원에서도 미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재래식 무기와 탄약 공급에서도 한계를 드러냈다. 독일의 경우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포탄이 부족해 한국과 미국에서 긴급 도입해야 했다.
방위산업 분야에서도 미국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유럽 주요국들의 주력 전투기는 대부분 미국산이거나 미국과의 공동 개발 제품이다. F-35 전투기의 경우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이 도입했거나 도입 예정이며, 이는 미국과의 기술 종속성을 심화시키고 있다.
산업정책과 기술 주권의 딜레마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는 단순한 군사력 확충을 넘어 기술 주권 확보를 목표로 한다. 특히 인공지능, 사이버 보안, 우주 기술 등 신흥 안보 분야에서 대미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EU는 2021년 출범한 ‘디지털 나침반’ 전략을 통해 반도체, 클라우드 컴퓨팅, 양자 컴퓨팅 등 핵심 기술 분야에서 자립 능력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는 430억 유로 규모의 유럽 칩법을 통해 글로벌 생산 점유율을 현재 8%에서 2030년 20%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우주 기술 분야에서도 독자적 능력 구축이 가속화되고 있다. 갈릴레오 위성항법시스템과 코페르니쿠스 지구관측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GPS와 상업 위성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 하고 있다. 또한 2025년부터 운영 예정인 EU 위성통신 시스템(IRIS²)을 통해 군사 통신의 독립성도 확보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 자립 노력은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요구한다. 반도체 생산 시설 구축에는 수년이 걸리며, 우주 발사체 기술 개발에는 수십 년의 경험 축적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여전히 미국과 다른 파트너들과의 협력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회원국 간 입장 차이와 내부 갈등
EU 내에서 전략적 자율성에 대한 입장은 국가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는 가장 적극적인 입장으로, 유럽군 창설과 NATO에 대한 의존도 축소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폴란드, 발트 3국 등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 위협에 직면한 상황에서 미국의 안보 보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대서양주의 입장을 견지해왔지만, 최근 전략적 자율성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NATO 틀 내에서의 유럽 방위력 강화를 선호하며, 프랑스의 급진적 제안에는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는 이러한 내부 갈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영국이 EU를 떠나면서, 유럽의 독자적 방위 능력 구축이 더욱 어려워졌다. 동시에 영국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AUKUS 동맹을 구축하며,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추진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하고 있다.
대중국 정책에서의 균열
전략적 자율성과 대서양 동맹 강화라는 이중 전략은 대중국 정책에서 가장 명확한 긴장을 보여준다. 미국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유럽에게도 같은 입장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유럽 국가들에게 중국은 여전히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며, 미국의 대중 견제에 무조건 동참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독일의 경우가 가장 복잡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중국은 독일의 최대 교역 파트너이며, 독일 자동차 업계는 중국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과 안보 고려로 인해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독자적 입장을 견지하려 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2023년 중국 방문에서 “유럽이 미-중 갈등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전략적 자율성 추구가 때로는 미국과의 이견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방위산업 경쟁력과 글로벌 시장
유럽 방위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는 전략적 자율성 실현의 핵심 요소다. 현재 전 세계 무기 수출에서 미국이 40%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유럽 전체의 점유율은 25% 수준이다. 더욱이 유럽 방위산업은 국가별로 분산되어 있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EU는 방위산업 통합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에어버스의 성공 사례를 방위 분야로 확산시키려는 것이다. 실제로 에어버스 디펜스 & 스페이스, 탈레스, 레오나르도 등 주요 방위업체들 간의 협력이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방위산업 통합은 각국의 산업 정책과 고용 문제와 직결되어 있어 쉽지 않다. 독일은 자국의 라인메탈을 보호하려 하고, 프랑스는 탈레스와 다소의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 이탈리아 역시 레오나르도의 독립성을 중시한다. 이러한 국가별 이해관계가 진정한 유럽 방위산업 통합을 어렵게 하고 있다.
미래 전망과 가능한 시나리오
현재의 추세를 고려할 때,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과 대서양 동맹 강화를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당분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완전한 미국 독립도, 전적인 미국 의존도 모두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NATO 틀 내에서 유럽의 방위 기여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국방비 증액과 유럽 내 미군 기지 현대화, 그리고 유럽 국가들의 역할 분담 확대가 그 구체적 내용이 될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기술 분야에서 점진적 자립도 제고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사이버 보안, 우주 기술, 드론 등 신흥 분야에서 유럽의 독자적 능력이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핵 억지력과 전략 무기 분야에서는 미국 의존도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결론
유럽연합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와 NATO 재활성화는 표면적으로는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변화하는 안보 환경에 대한 복합적 대응 전략이다. 러시아 위협의 현실화와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정책 전환, 그리고 중국의 부상이라는 복합적 도전에 직면한 유럽이 선택한 것은 ‘위험 분산’ 전략이다.
전략적 자율성은 장기적 목표로서 유럽의 독자적 안보 능력 구축을 추진하면서도, 단기적으로는 NATO를 통한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여 당면한 위협에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 전략은 필연적으로 내재적 긴장을 수반하지만, 현실적 제약 조건 하에서는 합리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성공적인 전략적 자율성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EU 회원국 간의 정치적 합의와 실질적 협력이 필요하다. 방위산업 통합, 공동 조달 확대, 그리고 기술 개발 협력 등이 그 핵심 과제다. 동시에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경쟁보다는 상호 보완적 역할 분담을 통해 대서양 동맹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결국 유럽의 안보는 전략적 자율성과 대서양 동맹이라는 두 축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럽이 진정한 안보 주체로 성장할 수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미국 의존적 지위에 머물 것인지는 향후 10-20년이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