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확장 정책의 새로운 전환점: 서방발칸과 우크라이나 후보국 지위가 던지는 의미와 도전

유럽연합의 확장 정책이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 2022년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의 EU 후보국 지위 획득, 그리고 서방발칸 국가들의 가입 협상 진전은 단순한 지리적 확장을 넘어 EU의 정체성과 미래 방향성을 다시 묻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27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현재의 EU가 과연 더 많은 국가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확장이 EU의 결속력과 효율성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

서방발칸 가입 협상의 현주소와 복잡한 정치적 동학

서방발칸 지역의 EU 가입 과정은 지난 20여 년간 가장 복잡하고 지난한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2012년과 2012년 각각 가입 협상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상당한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 특히 세르비아의 경우 코소보 독립 인정 문제와 러시아와의 관계 때문에 가입 협상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는 2020년에야 가입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불가리아의 역사 및 언어 분쟁으로 인한 북마케도니아 가입 협상 차단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EU 확장 과정에서 회원국 간 양자 갈등이 어떻게 전체 확장 과정을 마비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경우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2003년 잠재적 후보국 지위를 얻었지만, 내부의 복잡한 연방 구조와 민족 간 갈등으로 인해 실질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세르비아계가 주도하는 스릅스카 공화국의 분리 움직임과 EU 통합에 대한 소극적 태도는 보스니아 전체의 EU 가입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후보국 지위의 파격적 결정과 그 배경

2022년 6월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의 EU 후보국 지위 부여는 그 자체로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일반적으로 EU 후보국 지위를 얻기까지는 수년간의 준비 과정과 엄격한 코펜하겐 기준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러시아의 침공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이러한 절차가 대폭 간소화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순전히 지정학적 고려에 기반한 것이었다. EU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정치적 연대를 표명해야 했고, 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서구 진영에 확실히 묶어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실제 가입까지는 여전히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이 현실화될 경우 그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44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우크라이나는 독일, 프랑스에 이어 EU 내 세 번째로 큰 국가가 될 것이며, 이는 EU 내 권력 균형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 우크라이나의 가입은 기존 EU 농업 정책과 보조금 체계에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할 것이다.

확장 조건의 엄격함과 현실적 한계

EU는 새로운 회원국에 대해 소위 ‘코펜하겐 기준’을 적용해왔다. 이는 정치적 기준(민주주의, 법치주의, 인권 보장), 경제적 기준(시장경제 체제 구축), 그리고 EU 법령 수용 능력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의 적용은 항상 일관되지 않았고, 정치적 고려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법치주의 기준의 경우, 헝가리와 폴란드가 EU 가입 후 민주주의 후퇴를 보이면서 이 기준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새로운 후보국들에 대해서도 더욱 엄격한 모니터링 체계가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후보국들의 준비 상태는 천차만별이다. 서방발칸 국가들의 1인당 GDP는 EU 평균의 30-50% 수준에 불과하며, 우크라이나의 경우 전쟁으로 인해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된 상태다. 이들 국가의 가입은 EU 예산에 상당한 부담을 가져올 것이며, 특히 지역개발기금과 농업보조금 분야에서 기존 수혜국들과의 갈등이 예상된다.

회원국들의 확장 피로감과 내부 저항

EU 확장에 대한 기존 회원국들의 열정은 예전만 못하다. 2004년과 2007년 중동부 유럽 국가들의 대규모 가입 이후, 많은 서유럽 국가들은 확장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는 여러 요인에서 기인한다.

첫째, 노동력 이동으로 인한 사회적 긴장이다. 동유럽 출신 노동자들의 대규모 이주는 서유럽 국가들,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반이민 정서를 자극했다. 브렉시트 투표에서도 이러한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많다.

둘째, 예산 부담의 증가다. 새로 가입한 국가들은 대부분 EU 예산의 순수혜국이 되었고, 이는 기존 순기여국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추가 확장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셋째, 정치적 가치관의 차이다. 헝가리의 오르반 정권, 폴란드의 법과정의당 정권(2023년까지) 등은 EU의 핵심 가치인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도전해왔다. 이는 새로운 회원국들이 과연 EU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지정학적 고려와 전략적 딜레마

현재의 EU 확장 논의는 순수한 통합 논리보다는 지정학적 고려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EU로 하여금 동유럽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서방발칸 지역 역시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어, EU는 이 지역을 서구 진영에 확실히 묶어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정학적 동기는 EU 통합의 질적 측면과 충돌할 수 있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준비가 덜 된 국가들을 성급하게 받아들일 경우, EU 전체의 응집력과 효율성이 저하될 위험이 있다. 이는 ‘확장 대 심화’라는 EU 통합의 오랜 딜레마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있다.

터키의 사례는 이러한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터키는 2005년부터 가입 협상을 진행해왔지만, 에르도안 정권 하에서 민주주의 후퇴로 인해 협상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이는 지정학적 필요성만으로는 EU 가입이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제도적 개혁의 필요성과 현실적 제약

EU의 추가 확장은 필연적으로 제도 개혁을 요구한다. 27개 회원국 체제도 이미 의사결정의 복잡성과 비효율성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데, 30개 이상의 회원국을 가진 EU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는 근본적 의문이다.

유럽위원회는 현재 각 회원국마다 1명의 위원을 두고 있는데, 이는 확장 시 조직의 비대화를 초래할 것이다. 유럽의회의 경우도 의석 수 재배분 문제가 발생할 것이며, 각국의 투표권 조정 역시 복잡한 협상을 요구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의사결정 방식이다. 현재도 많은 분야에서 만장일치 원칙이 적용되고 있어 한 나라의 반대로 전체 정책이 막히는 경우가 빈번하다. 회원국이 늘어날수록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하지만 만장일치 원칙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각국의 주권 의식과 충돌하여 쉽지 않은 일이다.

경제적 통합의 심화와 확장의 상충

EU는 단순한 자유무역지대를 넘어 단일시장과 통화동맹을 구축해왔다. 하지만 새로운 회원국들이 이러한 고도의 경제 통합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유로존 가입의 경우, 엄격한 재정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후보국들은 이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경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막대한 재정 지출이 불가피할 것이며, 이는 유로존 가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은행동맹과 자본시장연합 등 금융 통합 분야에서도 후보국들의 준비 상태는 미흡하다. 이들 국가의 금융 시스템은 여전히 취약하며, EU의 엄격한 금융 규제 체계를 수용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미래 전망과 가능한 시나리오

현재의 상황을 종합해볼 때, EU 확장은 기존의 ‘빅뱅’ 방식보다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각 후보국의 준비 상태와 EU 내부의 수용 역량을 고려한 개별적 접근이 불가피할 것이다.

서방발칸 국가 중에서는 몬테네그로가 가장 먼저 가입할 가능성이 높다. 인구가 62만 명에 불과한 소국이어서 EU에 미치는 충격이 제한적이고, 가입 조건 충족도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반면 세르비아는 코소보 문제와 러시아 관계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전쟁 종료 후 10-15년 정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전후 재건 과정에서 EU의 지원을 받으며 점진적으로 EU 기준에 맞춰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다만 지정학적 고려로 인해 일부 분야에서는 특별한 배려가 있을 수도 있다.

결론

EU의 확장 정책은 현재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서방발칸과 우크라이나의 가입 문제는 단순한 지리적 확장을 넘어 EU의 정체성과 미래 방향을 결정하는 근본적 선택의 문제다. 지정학적 필요성과 내부 통합의 질적 발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성공적인 확장을 위해서는 후보국들의 충실한 준비와 함께 EU 자체의 제도적 개혁이 병행되어야 한다. 또한 기존 회원국들의 확장 피로감을 극복하고 새로운 확장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EU 확장의 성공 여부는 유럽 통합의 궁극적 목표와 가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민주주의, 법치주의, 인권이라는 공통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유럽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는지가 향후 확장 정책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