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정계에 또다시 큰 파장이 일고 있다. 7월 1일 태국 헌법재판소가 패통탄 친나왓(Paetongtarn Shinawatra) 총리에 대한 직무 정지 명령을 내리면서, 38세의 최연소 총리가 취임 1년도 채 안 돼 중대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개인의 부주의를 넘어 태국 정치의 구조적 모순과 권력 갈등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전화 통화 한 건이 부른 정치적 쓰나미
사건의 발단은 지난 6월 중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국과 캄보디아 간 국경 충돌이 발생한 가운데, 패통탄 총리가 훈센 캄보디아 상원의장(전 총리)과 나눈 전화 통화 내용이 온라인에 유출됐다. 문제가 된 것은 패통탄 총리가 이 통화에서 캄보디아 접경 지역을 담당하는 태국군 사령관을 ‘반대편’이라고 지칭하며 험담한 내용이었다.
5월 28일 태국 우본랏차타니주 남단 ‘청복(ChongBok)’ 지역에서 태국군과 캄보디아군이 약 10분간 총격전을 벌여 캄보디아군 병사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총리가 외국 정치인과의 통화에서 자국군을 비판한 것은 국가 위신과 군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헌법재판소의 신속한 판단
태국 헌법재판소는 보수 성향 상원의원 36명이 제출한 해임 청원을 받아들여 재판관 9명 중 7명의 찬성으로 패통탄 총리의 직무 정지를 결정했다. 헌재는 성명을 통해 “훈센 캄보디아 상원의장과의 통화 내용 유출 파문과 관련해 헌법 윤리 기준을 위반했는지 심리하겠다”고 밝혔다.
패통탄 총리 측에는 소명자료 제출 기한으로 15일이 주어졌으며, 직무 정지 기간 동안은 수리야 증룽르엉낏 부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을 예정이다. 이는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지속될 전망이어서 태국 정부 운영에 상당한 공백이 불가피해 보인다.
시나왓 가문의 정치적 운명
이번 사태는 시나왓 가문의 정치적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패통탄 총리는 2000년대 초반 태국을 이끌었던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이자, 2011년~2014년 총리를 지낸 잉락 친나왓의 조카로, 시나왓 가문의 세 번째 총리다.
탁신 가문은 오랫동안 태국 정치의 핵심 축을 이뤄왔지만, 동시에 군부와 보수 세력의 견제 대상이기도 했다. 탁신은 2006년 군사쿠데타로 축출됐고, 잉락 역시 2014년 헌법재판소 판결로 해임됐다. 패통탄의 직무 정지는 시나왓 가문이 또다시 제도적 견제에 직면했음을 보여준다.
패통탄은 2024년 8월 세타 타위신 전 총리가 부패 인사 장관 임명으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임된 직후 총리에 오른 바 있다. 취임 당시 역대 최연소 총리, 두 번째 여성 총리라는 기록을 세우며 주목받았지만, 1년도 채 안 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됐다.
태국 정치의 고질적 불안정성
이번 사태는 태국 정치의 고질적 불안정성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지난 20년간 태국은 반복적인 쿠데타, 정권 붕괴, 군부 개입 등으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군부 출신 쁘라윳 짠오차가 총리를 지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패통탄 총리는 올해 3월 하원에서 실시된 불신임 투표에서는 찬성 162표, 반대 319표로 부결되며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헌법재판소라는 사법부의 판단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주목할 점은 패통탄 총리가 직무 정지 가능성에 대비해 문화부 장관을 겸직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헌재가 총리 직무 정지 결정을 내려도 장관으로는 내각에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적 생존을 위한 치밀한 계산으로 해석된다.
국경 분쟁과 외교적 파장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태국-캄보디아 간 국경 분쟁이 자리하고 있다. 5월 말 발생한 총격전 이후 양국은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는 듯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군사적 긴장으로 비화했다.
태국은 국경 순찰을 강화하고 일부 검문소 운영을 축소해 육로 관광객의 출입을 차단하는 제재 조치를 시행했다. 캄보디아는 대응 차원에서 태국산 농산물·미디어 수입을 제한하고 태국 관련 인프라에 대한 인터넷·전기 공급을 끊는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패통탄 총리가 훈센과의 통화에서 자국군을 비판한 것은 외교적으로도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 간 분쟁 상황에서 총리가 외국 정치인과 자국군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것은 국가 위상에 타격을 주는 행위로 간주됐다.
동남아시아 정치 지형에 미치는 영향
태국의 정치 불안정은 동남아시아 전체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태국은 ASEAN의 핵심 회원국 중 하나로, 역내 경제협력과 정치적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패통탄 총리의 직무 정지로 태국 정부의 정책 일관성과 추진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디지털 월렛’ 경기부양책 등 핵심 정책들의 추진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어 경제적 파급효과도 우려된다.
앞으로의 전망
현재 상황에서 패통탄 총리의 정치적 운명은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에 달려 있다. 헌재가 윤리 위반을 인정할 경우 해임이 불가피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치적 타격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프아타이당 내부에서도 리더십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패통탄이 해임될 경우 새로운 총리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당내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태국 정치의 구조적 불안정성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민선 정부와 군부, 사법부 간의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정치적 혼란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패통탄 총리의 직무 정지 사태는 전화 통화 한 건에서 시작됐지만, 그 배경에는 태국 정치의 깊은 구조적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 위기가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가늠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