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9일, 태국 정계에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다. 파에통탄 시나와트라 총리가 캄보디아 훈센 원로원 주석과 나눈 통화 내용이 유출되면서 취임 10개월 만에 최대 정치 위기에 직면했다. “삼촌, 원하시는 건 뭐든 말씀만 하세요. 제가 다 해드리겠습니다”라는 굴욕적 발언과 자국 군 지휘관에 대한 비판이 담긴 이 통화는 태국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유출된 통화의 충격적 내용
6월 15일 파에통탄 총리와 훈센 원로원 주석 간의 9분짜리 통화 내용이 온라인에 유출되자 태국 국민들은 경악했다. 통화에서 38세 최연소 총리는 75세 캄보디아 실권자를 ‘삼촌’이라 부르며 극도로 낮은 자세를 보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파에통탄 총리가 태국 동부 지역 사령관을 ‘적(opponent)’이라고 지칭하고, 태국 2군 사령관 파클랑 중장을 겨냥해 “국가에 도움이 안 되는 말만 한다”며 비판한 부분이었다. 이는 태국 내에서 오랜 금기로 여겨졌던 ‘군부 비판’의 선을 넘은 발언으로 평가되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국경 분쟁에서 시작된 갈등
이번 통화의 배경에는 지난 5월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에서 벌어진 총격전이 있었다. 이 교전으로 캄보디아 군인 1명이 사망하면서 117년 전 프랑스 식민 통치 시절부터 이어진 양국의 해묵은 갈등에 다시 불이 붙었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817㎞에 이르는 국경을 공유하며, 이 경계 대부분은 1907년 프랑스 점령기에 만든 지도가 근거다. 특히 프레아비히어 사원 주변 지역은 오랫동안 양국 간 분쟁의 핵심 지역이었다.
파에통탄 총리는 갈등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훈센과 긴 통화를 나눴지만, 이 과정에서 국가 위신을 실추시키는 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정 붕괴와 정치적 고립
통화 내용이 유출된 직후 연정의 핵심 파트너인 품짜이타이당(Bhumjaithai Party)이 “국가 주권과 군의 명예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혔다”며 연정 탈퇴를 선언했다. 69석을 보유한 품짜이타이당의 탈퇴로 파에통탄 총리가 이끄는 프어타이당 연립정부는 하원 500석에서 과반(251석)을 겨우 1석 넘기는 불안정한 처지로 전락했다.
이는 파에통탄 총리에게 치명적 타격이다. 당장 정부가 무너지지 않더라도 야권 공세와 연정 내 이탈표가 한 표라도 더 나오면 언제든 실각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군부의 분노와 쿠데타 우려
태국 군부는 왕실과 국가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이를 빌미로 정치가 불안정해지면 수시로 쿠데타를 일으켜왔다. 태국 현대사에서 군부 쿠데타는 5~6년에 한 번 꼴로 등장했으며, 1932년 이후 93년 동안 14차례 쿠데타가 발생했다.
파에통탄의 아버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고모 잉락 친나왓 전 총리 모두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전력이 있어, 친나왓 가문에게는 더욱 민감한 문제다. 전문가들은 현직 총리가 외국 수반과의 통화에서 군 수뇌부를 적이라 칭한 것은 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준 것과 다름없다고 분석한다.
태국 왕립 군대는 이미 “국경 상황이 악화되면 고강도 작전을 수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으며, 이는 단순한 군사적 준비를 넘어 정치적 메시지로 해석되고 있다.
양국 관계 최악으로 치달아
정치적 논란과 별개로 태국과 캄보디아 관계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캄보디아는 지난주부터 반태국 감정을 이유로 태국산 과일과 인기 TV 드라마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영국 가디언은 전문가를 인용해 “태국 문화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국경 분쟁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는 상징적 조치”라고 전했다.
태국 역시 국경 검문소 통과 절차를 대폭 강화하며 보복 조치에 나섰다. 캄보디아에 대한 전력 공급과 인터넷 서비스도 차단하겠다고 위협했다.
경제 위기와 복합적 어려움
파에통탄 총리가 직면한 위기는 정치적 차원을 넘어선다. CNN은 “태국 경제가 현재 10년 만에 최악의 침체를 겪고 있다”며 “현재 태국은 미국의 대중국 관세 정책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까지 겹쳐 그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 갈등은 내부 불만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기 쉽다. 늘 있던 국경 분쟁도 파에통탄 총리의 리더십 위기와 태국 내 불안한 경제 상황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 실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친나왓 가문의 숙명
파에통탄 총리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로 2024년 8월 37세 나이에 태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두 번째 여성 총리로 선출됐다. 친나왓 가문은 태국 정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운 정치 지형의 중심에 있었다.
친나왓 가문의 포퓰리즘 정책은 농민 및 저소득층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었지만, 보수 및 왕족주의 세력으로부터는 강력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탁신과 잉락이 모두 정권에서 축출된 이력을 보면, 파에통탄 역시 같은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시위대의 사임 요구와 정치적 고립
19일 태국 반정부 시위대가 방콕 정부 청사 앞에 모여 파에통탄 총리의 즉각적인 사임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태국 개혁을 위한 학생과 국민 네트워크’의 주요 인물인 피칫 차이몽콘은 집회에서 태국이 캄보디아와 무력 충돌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야권은 의회 해산을 요구하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고, 파에통탄 총리는 19일 기자회견에서 공개 사과를 했지만 사태 진정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동남아 정세에 미칠 파장
태국은 아세안(ASEAN)의 핵심국이자 지정학적 요충지다. 이번 정치 위기는 태국 내수 문제를 넘어 동남아 전체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자극할 수 있다. 특히 미중 갈등이 첨예한 가운데, 태국의 정치 공백은 양측의 영향력 투사 경쟁을 자극할 수 있다.
태국 군부의 정치 개입이 반복되면서, 태국 민주주의의 안정성과 제도적 신뢰도는 중대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이는 국내 투자 환경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평가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위기 탈출의 가능성
파에통탄 총리가 이번 위기를 넘기려면 먼저 군부와의 관계 회복이 급선무다. 하지만 이미 신뢰가 크게 훼손된 상황에서 이를 복구하기는 쉽지 않다. 연정 복구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과제다.
과거 2025년 3월 패통탄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가 찬성 162표, 반대 319표, 기권 7표로 부결된 바 있어, 현재의 위기도 넘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그때와는 성격이 다르다. 군부의 직접적 이익과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태국 정치의 오랜 분열 구도 속에서 파에통탄 총리의 향후 행보가 태국 민주주의의 방향성과 동남아시아 안정을 가늠할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