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2025년 5월 28일 태국-캄보디아 국경의 촌욱(Chong Bok) 지역에서 발생한 총격전으로 캄보디아 군인 1명이 사망한 사건이 6월 들어 본격적인 외교위기로 번졌다. 단순한 국경 충돌을 넘어 ASEAN의 중재 능력과 동남아시아 지역 안정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발전하고 있다.
에메랄드 삼각지대에서 시작된 충돌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가 만나는 ‘에메랄드 삼각지대’의 촌욱(태국명) 또는 몸 베이(캄보디아명) 지역에서 벌어진 이번 사건은 동남아시아의 오래된 상처를 다시 한번 들춰냈다. 5월 28일 약 10분간의 짧은 교전에서 캄보디아 군인 1명이 사망한 후, 양국은 즉각 이 지역에 추가 병력을 배치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캄보디아군이 650미터 길이의 참호를 파며 군사 진지를 구축한 것이었다. 태국군은 이를 자국 영토 침범으로 간주하고 중단을 요구했지만, 캄보디아군이 먼저 발포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캄보디아는 자국이 오랫동안 주둔해온 지역에서 태국군이 무력을 사용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 지도 위의 갈등
이번 분쟁의 뿌리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인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제작한 지도가 500마일에 달하는 국경선을 정확히 표시하지 못했고, 태국(당시 시암)은 이 지도를 줄곧 거부해왔다. 특히 에메랄드 삼각지대를 포함한 약 12평방킬로미터 지역은 명확한 경계 획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분쟁의 씨앗으로 남아있다.
흥미롭게도 이 지역은 과거 관광 협력의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졌던 곳이다. 그러나 역사적 경계의 모호함과 양국의 민족주의적 정서가 결합되면서 평화적 활용 대신 군사적 대치의 장소로 변모했다.
국제사법재판소 vs 양자 협상: 엇갈린 해결책
6월 2일 훈 마넷 캄보디아 총리가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의사를 밝히면서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캄보디아는 몸 베이(에메랄드 삼각지대) 외에도 타 모안 톰, 타 모안 타우치, 타 크라베이 사원 등 4개 분쟁 지역을 모두 ICJ에 제소하겠다는 포괄적 접근을 선택했다.
반면 태국은 ICJ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기존의 공동경계위원회(JBC) 같은 양자 협상틀을 통한 해결을 고집하고 있다. 이는 과거 프레아 비히어 사원 분쟁에서 ICJ가 캄보디아 손을 들어준 경험 때문으로 분석된다. 태국은 1962년 ICJ 판결로 프레아 비히어 사원 소유권을 캄보디아에 넘겨준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ASEAN의 침묵: 비간섭 원칙의 한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의 대응은 이번 위기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회원국 간 분쟁임에도 불구하고 ASEAN은 전통적인 ‘비간섭 원칙’과 ‘콘센서스 의사결정’에 묶여 효과적인 중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가 중재 의사를 밝혔지만, 이는 개별 국가 차원의 선의에 그칠 뿐 ASEAN 차원의 체계적 대응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 사태에서와 마찬가지로 ASEAN의 구조적 한계를 다시 한번 드러내는 사례다.
정치적 계산과 민족주의의 부상
양국 지도부의 개인적 배경도 이번 갈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태국의 파에통탄 친나왓 총리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딸이고, 캄보디아의 훈 마넷 총리는 38년간 장기 집권한 훈 센 전 총리의 아들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탁신과 훈 센이 과거부터 긴밀한 정치적 유대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갈등이 격화된 것은 양국 내부의 정치적 필요와 민족주의 정서가 개인적 관계를 압도했음을 시사한다.
현지 언론들은 탁신 전 총리의 부패 혐의 재판이 6월 13일 본격 심리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태국 군부가 정치적 불만을 국경 사태로 돌리려 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의 ‘훈 가문’ 역시 국경 문제를 통해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적 파급효과와 민생 피해
군사적 긴장 고조는 즉각적인 경제적 충격으로 이어졌다. 태국 정부는 6월 7일부터 캄보디아와의 모든 국경 검문소 운영시간을 대폭 단축했다. 기존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되던 검문소들이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로 줄어들었고, 일부 검문소는 주 3일만 운영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양국 국민의 비자 유효기간이 기존 14일에서 7일로 단축된 점이다. 이는 국경 지역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상인들과 일용직 근로자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국경 무역에 의존하는 지역 주민들은 새로운 긴장 조성을 우려하며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사이버 전쟁의 그림자
흥미롭게도 이번 갈등에서는 사이버 전쟁의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한쪽의 해커 집단이 상대국 정부 웹사이트를 타겟으로 삼고 있으며, 전력과 인터넷 서비스 차단까지 위협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군사 충돌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전쟁 양상과 결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력 시위와 국제적 우려
6월 초 태국 방콕의 캄보디아 대사관 앞에서는 왕당파 민족주의 시위대들이 항의 집회를 벌였다. 이들은 태국 국기를 흔들며 캄보디아의 ‘영토 침범’을 규탄했다. 이런 시위는 과거 2008년 프레아 비히어 사원 분쟁 당시를 연상시키며, 민간 차원의 감정적 대립이 정부 간 외교적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국제사회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은 양국에 자제를 촉구하고 있으며, 특히 동남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
역사의 반복: 프레아 비히어의 교훈
이번 갈등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계속된 프레아 비히어 사원 분쟁과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당시 양국 충돌로 18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결국 ICJ의 개입으로 사원은 캄보디아 소유로 확정됐다. 하지만 사원 주변 4.6제곱킬로미터 지역에 대한 분쟁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역사가 반복되는 양상에서 주목할 점은 양국 모두 과거의 교훈을 충분히 학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000년 양해각서를 통해 국경 지역의 지형 변경을 금지하기로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캄보디아의 참호 구축으로 갈등이 시작됐다.
일시적 타협, 근본적 해결책은 여전히 멀어
6월 8일 양국은 군 병력을 2024년 합의 위치로 철수시키고 캄보디아가 파놓은 참호를 메우기로 합의했다. 표면적으로는 긴장이 완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여전히 요원하다.
6월 14일 프놈펜에서 열릴 예정인 공동경계위원회(JBC) 회의가 주목받고 있지만, 캄보디아의 ICJ 제소 의지가 변하지 않는 한 근본적 해결은 어려울 전망이다. 태국 역시 ICJ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교착상태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지정학적 함의: 중국과 미국의 그림자
이번 갈등은 더 큰 지정학적 맥락에서도 해석될 수 있다. 캄보디아는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태국은 미국과 전통적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비록 직접적인 개입은 없지만, 양국의 배후에 있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갈등 해결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동남아시아에서 경쟁하는 상황에서, 지역 국가 간 분쟁은 이들 강대국의 영향력 확대 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
미래 전망: 불안정한 평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태국-캄보디아 국경분쟁은 단기간 내 완전한 해결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몇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첫째, 양국이 현상유지를 택하며 주기적인 소규모 충돌이 반복되는 ‘냉전’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 둘째, 캄보디아의 ICJ 제소가 실제로 이루어져 법적 해결 과정이 시작될 수 있지만, 태국의 비협조로 실효성은 제한적일 것이다. 셋째, ASEAN이나 제3국의 중재로 새로운 협상틀이 마련될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결론: 동남아시아 평화의 시험대
태국-캄보디아 국경분쟁은 표면적으로는 12평방킬로미터의 작은 땅을 둘러싼 갈등이지만, 실제로는 동남아시아 지역 질서의 근본적 문제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식민지 시대의 미해결 유산, ASEAN의 구조적 한계, 민족주의 정치의 위험성, 그리고 강대국 경쟁의 지역적 투영까지 복합적 요소들이 얽혀있다.
이번 갈등이 평화적으로 해결되느냐 아니냐는 동남아시아가 진정한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에메랄드 삼각지대에서 피어난 작은 불꽃이 지역 전체를 태우는 화재로 번지지 않도록, 지혜로운 외교적 해결책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보다 양국 지도자들은 단기적 정치적 이익을 위해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는 대신, 미래 세대를 위한 평화적 공존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그 반복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