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3일, 브라질리아 이타마라티 궁에서 열린 브라질-카리브해 정상회의는 단순한 외교적 만남을 넘어 남미 지역 리더십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카리브해 16개국 정상들을 초청해 “근접을 통한 통합(Moving Closer to Unite)”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회의는 브라질의 외교 지평을 남미를 넘어 카리브해까지 확장하려는 야심찬 시도였다.
“남반구 연대”를 외친 룰라의 전략적 선택
룰라 대통령은 개막 연설에서 “우리의 뿌리는 저항의 역사로 얽혀 있고, 미래는 통합을 요구한다”며 남남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브라질이 국제 무대로 돌아왔으며, 이웃 국가들에 대한 무관심으로는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브라질 외교 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룰라가 카리브해 지역과의 협력을 자신의 외교 정책의 핵심 축 중 하나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2024년 브라질과 카리브해 국가들 간의 교역 규모가 40억 달러에 달했지만, 2010년 60억 달러 대비 30% 감소한 상황에서 이번 정상회의는 관계 복원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5대 협력 분야로 구체화된 실질적 파트너십
이번 정상회의에서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과 카리브해 간 협력의 5대 우선 분야를 제시했다. 기후변화 대응, 에너지 전환, 식량 안보, 연결성 강화, 그리고 아이티 지원이 그것이다.
기후변화와 COP30: 룰라는 2025년 11월 브라질 벨렝에서 열릴 COP30을 앞두고 “우리는 연합된 상태로 COP30에 도달해야 한다”며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바베이도스가 제안한 브리지타운 이니셔티브와 브라질의 바쿠-벨렝 로드맵을 연결해 1조 3천억 달러 규모의 기후 금융 조성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에너지 전환: 룰라는 “사탕수수가 식민지 과거의 상징에서 지속가능한 미래의 여권으로 변모했다”며 바이오연료 분야에서의 협력 가능성을 제시했다. 카리브해 국가들의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 생산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장기 투자 유치를 위한 전략적 계획을 강조했다.
구체적 성과: 6개 협정 체결과 아이티 지원
이번 정상회의는 말뿐인 외교 행사가 아니었다. 바하마와의 기술협력 협정, 바베이도스·수리남과의 항공 서비스 협정, 도미니카공화국과의 외교 교육 양해각서 등 6개의 구체적 협정과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특히 아이티 지원에서는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 미주개발은행(IDB)이 아이티를 위해 2억 9천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바베이도스, 쿠바, 세인트루시아, 카리브개발은행이 룰라가 주도하는 ‘기아와 빈곤 퇴치를 위한 글로벌 연합’에 가입을 약속했다. 현재 이 연합에는 192개 유엔 회원국 중 101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남미 블록 재편의 전초전
이번 카리브해 정상회의는 룰라의 더 큰 그림의 일부로 보인다. 그는 지난해 5월 브라질리아에서 남미 11개국 정상들을 모은 ‘브라질리아 컨센서스’ 회의를 주최했지만,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의 참석을 둘러싼 논란으로 칠레와 우루과이 등이 거리를 두면서 성과가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카리브해와의 협력은 상대적으로 정치적 부담이 적으면서도 브라질의 지역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전략적 선택으로 평가된다. 특히 G20 의장국 경험(2024년)과 COP30 개최국이라는 위상을 활용해 글로벌 남반구의 목소리를 결집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국제금융 시스템 개혁까지 거론
룰라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국제금융 시스템 개혁의 필요성까지 언급했다. 그는 “오염을 가장 적게 하면서도 가장 큰 피해를 받는 이들을 처벌하는” 현재의 국제금융 시스템을 비판하며, 달러에 의존하지 않는 지역 통화 창설의 “꿈”을 피력하기도 했다.
바베이도스의 미아 모틀리 총리도 “부유한 국가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다해야 글로벌 남반구가 자국 상황에 맞는 속도로 발전할 수 있다”며 룰라의 입장에 동조했다.
브라질 외교의 새로운 장
도미니카공화국의 루이스 아비나데르 대통령은 이번 브라질-카리브해 정상회의가 정기적인 지역 대화 플랫폼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는 룰라의 외교 전략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인 제도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룰라는 임기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G20 의장국 경험과 COP30 개최를 발판으로 브라질을 글로벌 리더십의 중심에 세우려 한다. 남미에서 시작해 카리브해로 확장되는 이번 외교 행보가 성공한다면, 브라질은 명실상부한 남반구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6월 13일 브라질리아에서 시작된 이 새로운 외교 실험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지켜볼 일이다. 적어도 룰라는 “브라질 외교가 다시 세계로 향하고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 세계에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