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통신 대기업 텔레포니카가 새 CEO 마르크 무르트라 취임과 함께 남미 사업을 대대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아르헨티나·페루·콜롬비아 등 대부분 남미 국가에서 철수하며 브라질·스페인·영국·독일 등 4개 핵심 시장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90년대부터 이어진 남미 확장, 이제는 철수 수순
텔레포니카는 1990년대 남미 민영화 물결을 타고 라틴아메리카 최대 통신사로 성장했다. 모비스타(Movistar) 브랜드로 중남미 시장 1위를 달리며 전체 수익의 절반을 남미에서 올릴 정도로 이 지역은 텔레포니카의 핵심 수익원이었다.
하지만 2025년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새로 취임한 마르크 무르트라 CEO는 “수익성 중심의 경영”을 내세우며 남미 사업 대대적 구조조정에 나섰다. 그 결과 1분기에만 17억 유로(약 2조 5천억 원)의 자산매각 손실을 기록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다.
속속 매각되는 남미 자산들
현재 진행 중인 텔레포니카의 남미 철수 현황은 충격적이다:
이미 매각 완료된 국가들:
- 아르헨티나: 텔레콤 아르헨티나에 12억 4,500만 달러에 매각 (2025년 2월)
- 페루: 아르헨티나의 인테그라 텍 인터내셔널에 90만 유로에 매각 (2025년 4월)
- 콜롬비아: 밀리콤에 4억 달러에 67.5% 지분 매각 (2025년 3월)
- 우루과이: 밀리콤에 4억 4,000만 달러에 매각
- 에콰도르: 밀리콤에 3억 8,000만 달러에 매각
매각 진행 중인 국가들:
- 칠레: 씨티은행을 매각 자문사로 고용
- 멕시코: JP모건을 매각 자문사로 고용
흥미롭게도 페루의 경우 자산 가치가 극도로 떨어져 단 90만 유로(약 13억 원)에 매각됐다. 이는 페루 자회사가 2월 파산보호 신청을 했을 정도로 경영난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만 예외… 5억 달러 신규 투자
대부분의 남미 국가에서 철수하는 가운데 베네수엘라만은 예외적으로 남겨뒀다. 텔레포니카는 베네수엘라에서 4G·5G 인프라 확대를 위해 향후 2년간 5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베네수엘라 시장의 특수성 때문으로 분석된다. 경쟁사 부재와 상대적으로 독점적 지위를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현지 모비스타 책임자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는 “경쟁이 치열한 다른 시장과 달리 베네수엘라는 여전히 성장 잠재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4개 핵심 시장 집중 전략
텔레포니카의 새로운 전략은 명확하다. 브라질·스페인·영국·독일 등 4개 핵심 시장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이 4개 시장은 전체 3억 고객 중 2억 1,800만 명을 차지하며, 그룹 전체 매출의 80%를 담당한다.
특히 브라질은 텔레포니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비보(Vivo) 브랜드로 브라질 최대 이통사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난해 현지 통화 기준 7% 성장을 기록했다. 텔레포니카 브라질은 상파울루 증시에 상장된 핵심 자회사로, 최근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 IPNET과 IPNET USA를 인수하는 등 적극적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
남미 철수 배경: 구조적 한계와 금융 부담
텔레포니카가 남미에서 철수하는 배경에는 여러 구조적 문제가 있다:
1. 환율 리스크와 정치적 불안정
아르헨티나 등 남미 주요국의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환율 변동성이 수익성을 크게 악화시켰다. 실제로 2025년 1분기 아르헨티나 등 변동성 높은 시장에서 20억 유로의 손상차손을 기록했다.
2. 과도한 규제와 스펙트럼 비용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의 과도한 스펙트럼 사용료와 규제 강화가 수익성을 압박했다. 텔레포니카는 멕시코에서 스펙트럼 라이선스를 포기하고 경량화된 운영 방식으로 전환할 정도였다.
3. 과도한 경쟁과 수익성 악화
남미 시장은 아메리카 모빌(América Móvil), 밀리콤(Millicom) 등 강력한 경쟁사들이 각축을 벌이는 치열한 시장이다. 특히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요금 하락 압박이 지속됐다.
글로벌 통신업계의 새로운 트렌드
텔레포니카의 남미 철수는 글로벌 통신업계의 새로운 트렌드를 보여준다. 과거 ‘시장 점유율 확대’에 중점을 뒀던 전략에서 ‘수익성과 자본 효율성’ 중심의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무르트라 CEO는 “텔레포니카는 긴 도전과 성공의 여정을 걸어왔다”며 “이제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핵심 시장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2025년 하반기 새로운 전략을 발표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연간 20억 유로의 추가 매출을 창출하겠다고 공언했다.
남미 통신 시장 재편 전망
텔레포니카의 철수는 남미 통신 시장의 대대적 재편을 예고한다. 주요 수혜자는 밀리콤과 아메리카 모빌이 될 가능성이 높다.
밀리콤은 이미 콜롬비아·우루과이·에콰도르 등에서 텔레포니카 자산을 인수하며 남미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티고(Tigo) 브랜드로 남미 전역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밀리콤은 텔레포니카가 떠난 공백을 빠르게 메우고 있다.
아메리카 모빌은 이미 2019년 텔레포니카의 과테말라 사업을 인수한 바 있으며, 다른 시장에서도 확장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국 기업들에게는 기회
텔레포니카의 남미 철수는 한국 통신·IT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5G 인프라 구축과 디지털 전환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이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남미 각국이 통신 인프라 현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우수한 통신 기술과 솔루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전망이다.
마무리: 변화하는 글로벌 통신업계
텔레포니카의 남미 철수는 단순한 기업의 구조조정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글로벌 통신업계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과거 신흥시장 진출을 통한 고객 확대에 주력했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수익성과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텔레포니카의 선택이 성공할지는 시간이 증명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글로벌 통신업계에 새로운 전략적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남미 통신 시장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넘어갈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기회가 창출될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