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이 주목하는 PCAF, 탄소회계의 새로운 표준

기후변화가 금융 시스템의 핵심 리스크로 부상하면서, 금융기관들이 자신들의 투자와 대출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측정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PCAF(Partnership for Carbon Accounting Financials, 탄소회계금융연합)가 글로벌 금융업계의 새로운 게임체인저로 떠오르고 있다.

PCAF란 무엇인가

PCAF는 2015년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업계 이니셔티브다. 정식 명칭은 Partnership for Carbon Accounting Financials로, 말 그대로 ‘탄소 회계를 위한 금융 파트너십’이다. 이 조직의 핵심 목표는 금융기관들이 자신들의 투자와 대출 포트폴리오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일관되고 투명한 방식으로 측정하고 공개할 수 있도록 표준화된 방법론을 제공하는 것이다.

PCAF가 중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금융기관들은 직접적인 온실가스 배출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투자와 대출을 통해 다른 산업의 탄소 배출에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은행이 석탄발전소에 대출을 해주거나 자산운용사가 화석연료 회사에 투자하면, 이는 곧 탄소 배출 증가로 이어진다. PCAF는 이런 ‘금융 배출량(financed emissions)’을 체계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PCAF 표준의 핵심 구조

PCAF 표준은 크게 6개 자산 클래스로 구분된다. 각 자산 클래스마다 서로 다른 계산 방법론을 적용한다.

상장 주식과 회사채가 첫 번째 자산 클래스다. 이는 가장 측정하기 쉬운 영역이기도 하다. 투자 대상 기업의 총 배출량에서 투자 비중만큼을 할당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의 주식을 1% 보유하고 있다면, 그 기업 전체 배출량의 1%가 투자기관의 배출량으로 계산된다.

비즈니스 대출과 미상장 주식은 두 번째 영역이다. 여기서는 대출 잔액이나 투자 금액을 기준으로 배출량을 할당한다. 대출 기업의 총 자산 대비 대출 비중만큼 배출량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프로젝트 파이낸스는 특별한 접근이 필요하다. 특정 프로젝트에 직접 연결된 배출량을 측정하기 때문에, 해당 프로젝트의 전체 배출량에서 금융기관의 자금 지원 비중만큼을 계산한다.

상업용 부동산주택담보대출, 그리고 자동차 대출은 각각 고유한 방법론을 적용한다. 부동산의 경우 건물의 에너지 효율성과 사용량을 고려하고, 자동차는 차종별 연비와 주행거리를 반영한다.

데이터 품질과 측정의 정확성

PCAF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데이터 품질 점수 시스템이다. 1점부터 5점까지의 척도로 데이터의 정확성을 평가한다.

1점은 가장 높은 품질로, 실제 배출량 데이터를 직접 확보한 경우다. 투자 대상 기업이 직접 공개한 검증된 배출량 데이터를 사용할 때 받을 수 있는 점수다.

2점은 기업이 보고한 배출량 데이터지만 일부 추정이 포함된 경우다. 대부분의 상장기업 투자에서 이 수준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3점은 물리적 활동 데이터(예: 생산량, 에너지 소비량)를 바탕으로 배출량을 추정한 경우다. 직접적인 배출량 데이터는 없지만 신뢰할 만한 활동 데이터가 있을 때 적용된다.

4점은 경제적 데이터(매출액, 자산 규모 등)를 이용해 배출량을 추정한 경우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지만 정확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5점은 가장 낮은 품질로, 산업 평균이나 대리 데이터를 사용한 경우다. 정확한 데이터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글로벌 확산과 도입 현황

PCAF는 설립 초기 네덜란드 금융기관 7곳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전 세계 400개 이상의 금융기관이 참여하는 거대한 연합체로 성장했다. 이들의 총 자산 규모는 130조 달러를 넘어선다.

유럽에서는 가장 활발한 도입이 이뤄지고 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 주요국의 대형 은행과 자산운용사들이 앞다퉈 PCAF 방법론을 도입하고 있다. 특히 EU의 지속가능금융공시규정(SFDR)과 EU 택소노미가 시행되면서 PCAF 표준 활용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북미에서도 도입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 스트리트 같은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PCAF 방법론을 활용해 기후 리스크를 평가하고 있다. 캐나다의 주요 연기금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일본과 호주가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의 3대 메가뱅크와 주요 생명보험사들이 PCAF에 가입했고, 호주의 4대 은행도 모두 참여하고 있다.

한국 금융업계의 PCAF 도입

한국에서도 PCAF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2021년부터 주요 금융지주회사들이 연이어 PCAF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KB금융그룹이 2021년 국내 금융지주 최초로 PCAF에 가입하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신한금융그룹, 하나금융그룹, 우리금융그룹이 차례로 참여했다. NH농협금융지주도 2022년에 가입을 완료했다.

국내 자산운용업계에서도 움직임이 활발하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삼성자산운용, 한국투자신탁운용 등 주요 운용사들이 PCAF 방법론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ESG 펀드 운용에서 탄소 배출량 측정이 필수 요소로 자리잡으면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국민연금도 PCAF 도입을 적극 검토 중이다. 세계 3위 규모의 연기금으로서 기후 책임투자를 강화하기 위해 PCAF 방법론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실무 도입 과정의 주요 과제

PCAF 방법론을 실제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들은 여러 과제에 직면한다.

데이터 확보가 가장 큰 난제다. 특히 한국 중소기업이나 비상장 기업의 경우 온실가스 배출량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산업 평균치나 매출액 기반 추정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측정 정확도를 떨어뜨린다.

시스템 구축과 인력 확보도 중요한 과제다. PCAF 방법론을 제대로 적용하려면 전문적인 IT 시스템과 숙련된 인력이 필요하다. 특히 수십만 건의 대출과 투자 건을 일일이 분석해야 하므로 자동화된 시스템 구축이 필수다.

업무 프로세스 통합도 쉽지 않다. 기존의 신용평가, 투자심사, 리스크 관리 프로세스에 탄소 배출량 측정을 자연스럽게 통합하는 것이 관건이다. 단순히 별도 업무로 처리하면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규제 동향과 의무화 전망

전 세계적으로 PCAF 방법론 사용이 의무화되는 추세다. EU는 이미 대형 금융기관들에게 기후 관련 재무정보 공개를 의무화했고, 여기에 PCAF 방법론 활용이 권장되고 있다.

영국은 2022년부터 상장 금융기관과 대형 자산운용사에게 TCFD 기반 기후 공시를 의무화했는데, 여기에 Scope 3 배출량 측정이 포함되어 있어 PCAF 방법론 사용이 사실상 필수가 되었다.

일본도 2022년부터 도쿄증권거래소 프라임 시장 상장기업에 기후 공시를 의무화하면서, 금융기관들의 PCAF 도입이 가속화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명시적인 의무화 규정은 없지만, 금융당국이 기후 리스크 관리 강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어 조만간 관련 규정이 도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2025년부터 시행 예정인 K-택소노미와 연계해 PCAF 방법론 활용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산업별 적용 사례와 특이점

PCAF 방법론은 산업별로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제조업의 경우 생산량 데이터를 활용한 배출량 추정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특히 철강, 화학, 시멘트 같은 탄소 집약적 산업은 정확한 데이터 확보가 가능해 높은 품질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서비스업은 배출량 측정이 더 복잡하다. 직접적인 제조 과정이 없어 주로 전력 사용량과 건물 운영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을 측정해야 한다. 이 경우 매출액 기반 추정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부동산업은 PCAF에서 별도의 자산 클래스로 분류될 만큼 특별한 접근이 필요하다. 건물의 에너지 효율 등급, 실제 에너지 사용량, 입주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금융업은 이중 계산 문제를 피해야 한다. 은행이 다른 금융기관에 대출을 해준 경우, 해당 금융기관의 배출량을 그대로 적용하면 같은 배출량이 두 번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 혁신과 자동화 동향

PCAF 방법론의 실무 적용을 위해 다양한 기술 솔루션들이 개발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머신러닝을 활용한 배출량 추정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제한된 데이터만으로도 높은 정확도의 배출량을 추정할 수 있는 알고리즘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위성 데이터 활용도 확대되고 있다. 실시간 위성 이미지를 통해 공장의 가동 현황, 산림 훼손 정도 등을 파악해 배출량을 추정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배출량 데이터 검증 시스템도 연구되고 있다. 데이터의 무결성과 투명성을 보장하면서도 효율적인 데이터 공유가 가능한 플랫폼 구축이 목표다.

API 연동 솔루션도 중요하다. 금융기관의 기존 시스템과 PCAF 계산 엔진을 자동으로 연결해주는 솔루션들이 개발되고 있어, 수동 작업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투자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

PCAF 방법론 도입은 금융기관의 투자 의사결정 과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포트폴리오 구성에서 탄소 집약도가 핵심 지표로 자리잡고 있다. 같은 수익률이라면 탄소 배출량이 적은 기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는 결국 저탄소 기업들의 자금 조달 비용 하락으로 이어진다.

ESG 펀드 운용에서는 PCAF가 필수 도구가 되었다. 펀드의 탄소 발자국을 정확히 측정하고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PCAF 방법론 없이는 ESG 펀드 운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출 심사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부 선진국 은행들은 이미 대출 금리 결정 시 차주 기업의 탄소 배출량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친환경 기업에게는 우대 금리를, 탄소 집약적 기업에게는 가산 금리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미래 전망과 발전 방향

PCAF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현재 6개 자산 클래스에서 시작해 점차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보험업 적용 방법론이 개발 중이다. 보험회사의 언더라이팅 포트폴리오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을 측정하는 방법론이 2024년 말 공개될 예정이다.

소버린 본드(국채) 투자에 대한 방법론도 연구되고 있다. 국가 단위의 배출량을 어떻게 투자 비중에 따라 배분할지에 대한 기술적 논의가 활발하다.

생물다양성자연자본까지 측정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PCAF의 성공을 바탕으로 자연 관련 재무정보 공개 태스크포스(TNFD)와의 연계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실시간 모니터링 기능도 강화될 예정이다. 현재는 주로 연간 단위로 배출량을 측정하지만, 향후에는 분기별, 월별 추적도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금융업계의 대응 전략

한국 금융기관들이 PCAF를 효과적으로 도입하기 위해서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1단계에서는 상장 주식과 회사채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상대적으로 데이터 확보가 쉽고 방법론도 단순해 초기 학습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2단계에서는 주요 대출 고객사들을 대상으로 범위를 확장한다. 기업 금융 부문에서 대형 고객사들의 배출량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다.

3단계에서는 중소기업과 개인 대출까지 포함한 전체 포트폴리오로 확대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화된 시스템과 추정 방법론이 핵심이다.

인력 양성도 중요하다. PCAF 방법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확보하거나 기존 직원들을 교육해야 한다. 특히 환경공학, 통계학, 데이터 사이언스 배경을 가진 인재들의 영입이 필요하다.

외부 협력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글로벌 PCAF 커뮤니티에 참여해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국내외 전문 업체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기술과 노하우를 확보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PCAF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기후변화 대응이 금융업계의 핵심 과제로 부상한 상황에서, PCAF 방법론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도입하고 활용하느냐가 금융기관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기관만이 미래 금융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