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 발발 배경과 전개 과정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시디부지드에서 한 청년의 분신이 중동 전역을 뒤흔드는 민주화 물결의 시작이 되었다. 모하메드 부아지지라는 26세 과일 행상이 경찰의 부패와 굴욕적 대우에 항의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사건이었다. 이 개인적 비극이 수십 년간 억압받아온 아랍 민중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아랍의 봄이 발생한 배경에는 복합적인 구조적 요인들이 있었다. 첫째, 권위주의 체제의 고착화와 부패 만연이었다. 중동 지역의 많은 국가들이 수십 년간 같은 지도자나 가문의 통치를 받으며 정치적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둘째, 경제적 불평등과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했다. 인구의 60% 이상이 30세 미만인 중동 지역에서 청년 실업률은 25%를 넘나들었다.
셋째, 교육 수준 향상과 정보 접근성 증대가 정치 의식을 높였다. 대학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이 늘어났지만 이들이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넷째, 소셜미디어의 확산이 시민 조직화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시위 정보가 빠르게 퍼지고 시민들이 연대할 수 있었다.
2011년 1월 14일 튀니지의 벤 알리 대통령이 23년 통치를 끝내고 망명길에 오르면서 ‘재스민 혁명’이 성공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이집트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1월 25일 이집트 전역에서 “빵, 자유, 사회정의”를 외치는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다. 18일간의 시위 끝에 2월 11일 30년간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하야했다.
민주화 바람은 리비아, 예멘, 바레인, 시리아로 확산되었다. 각국의 상황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장기 집권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서구 언론은 이를 ‘아랍의 봄’이라고 명명하며 중동 지역의 역사적 변화를 예고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 결과는 매우 엇갈린다.
튀니지: 민주주의 이행의 성공 사례
튀니지는 아랍의 봄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 이행에 성공한 사례로 평가된다. 벤 알리 정권 붕괴 후 튀니지는 비교적 평화로운 정치 전환을 경험했다. 임시정부가 구성되었고, 2011년 10월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슬람주의 정당인 엔나흐다(부흥당)가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에는 못 미쳤다.
튀니지 민주화의 성공 요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사회 구조였다. 튀니지는 아랍계가 98%를 차지하는 단일 민족 국가로 종족·종파 갈등이 적었다. 둘째, 중산층과 시민사회의 역할이 컸다. 변호사협회, 노동조합, 인권단체 등이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셋째, 군부의 중립적 태도였다. 튀니지 군부는 전통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고, 벤 알리 정권에 대한 충성도도 낮았다. 군부가 시위 진압을 거부하면서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 넷째, 정치 세력 간 타협과 대화 문화가 있었다. 2013-2014년 정치 위기 때도 전국대화기구(National Dialogue Quartet)의 중재로 평화적 해결이 가능했다.
2014년 새 헌법이 제정되었고, 대통령과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세속주의 정당인 니다 투니스(튀니지의 부름)가 의회 선거에서 승리했고, 베지 카이드 에세브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9년에는 두 번째 민주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튀니지의 민주화도 완전히 성공적이지는 않다.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고, 지역 간 불평등도 심화되었다. 청년 실업률은 여전히 35%를 넘나든다. 2021년 7월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고 비상권한을 행사하면서 민주주의 후퇴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집트: 군부 권위주의로의 회귀
이집트는 아랍의 봄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군부 권위주의로 회귀한 대표적 사례다. 무바라크 하야 후 이집트는 복잡한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군최고위원회(SCAF)가 임시 통치를 맡았고,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의 모하메드 무르시가 당선되었다.
무르시 정부는 1년여 집권하는 동안 심각한 정치적 분열에 직면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주의 색채를 강화하려 했고, 세속주의 세력과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경제 상황도 악화되었고, 치안 불안이 계속되었다. 2013년 6월부터 무르시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다.
2013년 7월 3일 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이 쿠데타로 무르시를 축출했다. 엘시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군사 쿠데타로 제거한 것이지만, 이를 ‘인민 혁명’이라고 정당화했다. 이후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시작되었다. 2013년 8월 라바 알아다위야 시위 진압에서 수백 명이 사망했다.
2014년 엘시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집트는 사실상 군부 독재체제로 회귀했다. 무바라크 시대보다도 더 강화된 권위주의 체제가 구축되었다. 시민사회는 완전히 통제되었고, 언론의 자유도 크게 제약받았다. 정치적 반대 세력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탄압받았다.
엘시시 정부는 경제 개발을 내세워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신행정수도 건설, 수에즈운하 확장 등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들은 주로 군부 계열 업체들이 수주하면서 군산복합체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반 국민들의 생활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집트 사례는 민주화 과정에서 군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간의 갈등, 혁명 이후 경제적 안정의 중요성, 기존 기득권 세력의 저항 등 민주화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문화적 기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시리아: 내전으로 치달은 비극
시리아는 아랍의 봄이 가장 비극적 결과를 낳은 사례다. 2011년 3월 다라 지역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11년째 계속되는 내전으로 발전했다. 5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1200만 명이 난민이 되는 인도적 재앙이 벌어졌다.
시리아 내전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잔혹한 진압이 평화적 시위를 무장 투쟁으로 변화시켰다. 알라위파 소수 집권층과 수니파 다수 국민 간의 종파 갈등도 내전을 격화시켰다. 2012년부터 자유시리아군(FSA) 등 반군 조직이 본격적인 무장 투쟁에 나섰다.
외부 세력의 개입이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러시아와 이란은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고, 서방과 걸프 국가들은 반군을 후원했다. 2014년부터는 ISIS(이슬람국가)가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를 장악하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미국 주도 연합군이 ISIS 공습에 나서면서 시리아는 다자간 전쟁터가 되었다.
2015년 러시아의 직접적 군사 개입은 전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러시아의 공습 지원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이 주요 도시들을 하나씩 탈환하기 시작했다. 2016년 알레포 함락, 2018년 동구타와 다라야 탈환 등으로 반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현재 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영토의 70% 이상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시리아는 여전히 분열 상태다. 터키가 지원하는 반군이 북서부 이들립을 통제하고 있고, 미군이 지원하는 쿠르드족 세력(SDF)이 동북부를 장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 세력 견제를 위해 시리아에 대한 공습을 계속하고 있다. 터키는 쿠르드족 견제를 위해 여러 차례 시리아를 침공했다.
시리아 내전은 중동 지정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란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고, 러시아가 중동의 주요 행위자로 복귀했다. 반면 미국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시리아 재건에는 수천억 달러가 필요하지만 서방은 아사드 정권 하에서의 재건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의 상이한 경험
아랍의 봄은 각국의 구조적 조건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를 낳았다. 리비아는 2011년 카다피 정권이 NATO의 지원을 받은 반군에 의해 붕괴된 후 지금까지 분열 상태다.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각각 다른 정부가 통치하고 있고, 외부 세력들이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
예멘은 2012년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물러난 후 정치적 전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2014년 이란이 지원하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점령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아랍연합군의 개입으로 대리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바레인은 시아파 다수 국민과 수니파 소수 왕실 간의 갈등이 표출되었지만, 사우디와 UAE의 군사 개입으로 왕정이 유지되었다. 걸프협력회의(GCC)의 결속을 통해 민주화 요구를 억누를 수 있었다.
알제리와 수단은 2019년 대규모 시위로 장기 집권자들이 물러났지만 아직 민주화 성과는 제한적이다. 알제리는 군부가 여전히 실권을 장악하고 있고, 수단은 2021년 군사 쿠데타로 민간 정부가 해산되었다.
모로코와 요단은 선제적 개혁을 통해 체제를 유지했다. 입헌군주제의 틀 안에서 제한적 개혁을 실시하여 시위를 잠재웠다. 걸프 산유국들은 경제적 혜택 확대를 통해 정치적 불만을 달랬다.
아랍의 봄 실패 원인 분석
아랍의 봄이 대부분 국가에서 실패한 원인은 다차원적이다. 첫째, 기존 국가 기구의 해체와 재건 실패다. 혁명 과정에서 경찰, 군대, 관료제 등 국가 기구가 붕괴되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제도가 구축되지 못했다. 국가 능력의 공백이 발생하면서 치안 불안과 경제 침체가 이어졌다.
둘째, 민주적 문화와 제도의 부재다. 수십 년간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온 사회에서 하루아침에 민주주의가 작동하기는 어려웠다. 정치적 타협, 법치주의, 시민사회 등 민주주의의 기반이 취약했다. 정치 세력 간 제로섬 게임이 지속되면서 합의를 도출하기 어려웠다.
셋째, 경제적 기대와 현실의 괴리였다. 민주화로 경제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정치적 불안정으로 투자가 위축되고 관광업이 타격을 받으면서 경제가 악화되었다. 혁명의 주체였던 청년층의 실업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넷째, 종파·부족 갈등의 표면화였다. 권위주의 체제가 억누르고 있던 사회적 균열이 민주화 과정에서 분출되었다. 시리아의 알라위파-수니파 갈등, 이라크의 시아파-수니파-쿠르드족 갈등, 리비아의 부족 갈등 등이 내전으로 이어졌다.
다섯째, 지역 강대국들의 개입과 대리전이었다. 사우디와 이란, 터키와 UAE 등이 각자의 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개입하면서 갈등이 국제화되었다. 민주화보다는 지역 패권 경쟁이 우선시되었다.
여섯째, 기존 엘리트들의 저항과 적응이었다. 구체제 세력들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반격을 시도했다. 이집트의 엘시시 쿠데타가 대표적 사례다.
외부 세력의 역할과 한계
아랍의 봄에 대한 외부 세력의 대응은 일관성이 부족했다. 서방 국가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안정성과 자국 이익을 우선시했다. 리비아에서는 NATO가 직접 개입했지만, 시리아에서는 제한적 지원에 그쳤다. 바레인에서는 민주화 시위를 묵인했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아랍의 봄 초기에 민주화를 지지했지만 점차 소극적으로 변했다. 이집트에서 무르시 정부를 지지했다가 엘시시 쿠데타를 묵인하는 등 일관성이 부족했다. 시리아 내전에서도 “레드라인” 발언을 했지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유럽연합은 민주화 지원을 약속했지만 재정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무엇보다 난민 문제가 부각되면서 안정성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튀니지 지원도 충분하지 않았고, 리비아 사태로 인한 난민 유입에 주로 관심을 보였다.
러시아와 중국은 서방의 민주화 지원을 제국주의적 개입으로 규정하고 반대했다. 러시아는 시리아에서 아사드 정권을 적극 지원하면서 반서방 진영의 결속을 도모했다. 중국은 직접 개입보다는 경제적 기회를 모색했다.
지역 강대국들의 개입이 더 결정적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는 이슬람주의 세력의 확산을 우려하여 이집트의 엘시시 쿠데타를 지원했다. 이란은 시리아와 예멘에서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개입했다. 터키는 이슬람주의 세력을 지원하면서 지역 패권을 추구했다.
이스라엘은 아랍의 봄을 위협으로 인식했다. 무바라크 같은 예측 가능한 독재자보다 불확실한 민주 정부를 더 우려했다. 시리아 내전에서는 이란 세력 확산을 막기 위해 제한적으로 개입했다.
아랍의 봄 10년 후 중동 질서
아랍의 봄 10년 후 중동 질서는 크게 변화했다. 첫째, 국가 시스템의 붕괴와 재편이 일어났다. 시리아, 리비아, 예멘, 이라크 등에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거나 상실되었다. 국경의 의미가 퇴색하고 비국가 행위자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둘째, 종파 갈등이 지정학적 경쟁의 주요 축이 되었다. 사우디-이란 갈등이 수니파-시아파 대립으로 포장되면서 중동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종파 정체성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면서 갈등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셋째, 권위주의의 복원과 강화가 나타났다. 이집트의 엘시시 정권,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등은 이전보다 더 강화된 억압 체제를 구축했다. 민주화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안정을 추구하는 여론도 늘어났다.
넷째, 지역 강대국들의 대리전이 격화되었다. 사우디-이란, 터키-UAE 등의 경쟁이 여러 국가에서 대리전 형태로 나타났다. 이념보다는 지정학적 이익이 우선시되면서 갈등이 복잡해졌다.
다섯째,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내전과 정치 불안으로 경제가 파괴되었고, 청년 실업과 빈곤이 더욱 악화되었다. 경제적 절망이 극단주의와 이민 증가로 이어졌다.
결론
아랍의 봄은 중동 지역에 역사적 변화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귀결되었다. 튀니지를 제외하고는 민주주의 정착에 성공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많은 국가에서 내전, 국가 붕괴, 권위주의 강화 등의 부정적 결과가 나타났다.
이런 실패는 민주화가 단순히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민주적 제도의 구축, 시민사회의 발전, 경제적 기회의 확대, 사회적 합의의 형성 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분열된 사회에서 포용적 정치 체제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드러냈다.
아랍의 봄의 교훈은 여러 가지다. 첫째, 민주화는 장기적이고 복잡한 과정이며 외부의 지원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둘째, 기존 국가 기구를 완전히 해체하기보다는 점진적 개혁이 더 안전할 수 있다. 셋째, 경제적 성과 없는 정치적 자유는 지속되기 어렵다. 넷째, 종파나 부족 등 사회적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아랍의 봄 10년 후 중동 지역은 여전히 격변 중이다.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고 있고, 경제적 압박은 계속되고 있다. 기후변화, 물 부족, 인구 증가 등 새로운 도전들도 등장하고 있다. 아랍의 봄이 실패했다고 해서 변화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변화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중동의 미래는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