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에너지의 심장부, 페르시아만
페르시아만은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65%와 천연가스 매장량의 35%가 집중된 에너지의 보고다. 이 좁은 수역을 통해 전 세계 석유 수송량의 20% 이상이 운송되며, 특히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경제의 목줄’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페르시아만은 20세기 후반부터 국제 정치의 핵심 무대가 되어왔다.
이 지역의 안보 구조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 패권 경쟁이고, 둘째는 1981년 창설된 걸프협력회의(GCC)를 통한 아랍 산유국들의 집단 안보 체제이며, 셋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부 강대국의 안보 개입이다. 이 세 축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페르시아만 안보의 기본 틀을 형성하고 있다.
1979년 이란 혁명과 지역 질서의 급변
샤 체제의 붕괴와 그 여파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은 페르시아만 지역의 안보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다. 팔레비 왕조는 1953년 CIA가 주도한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걸프 지역의 패권국 역할을 했다. 풍부한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대규모 군비 증강을 추진하여 ‘걸프의 헌병’ 역할을 자처했다.
샤는 1971년 영국이 걸프에서 철수한 후 힘의 공백을 메우며 지역 안정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불평등과 서구화에 대한 종교적 반발이 누적되면서 혁명의 토양이 마련된다. 1978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결국 샤를 축출하고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탄생시킨다.
이란 혁명은 걸프 지역의 아랍 군주국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인식된다. 혁명 정부는 이슬람 혁명의 수출을 공언하며 왕정과 독재 체제의 타도를 외쳤다. 특히 바레인과 쿠웨이트, 사우디 동부 지역의 시아파 주민들에 대한 선동은 아랍 군주국들의 큰 우려 사항이었다.
카터 독트린과 미국의 개입 확대
이란 혁명과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미국으로 하여금 걸프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결심하게 만든다. 1980년 1월 카터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페르시아만 지역을 지배하려는 외부 세력의 어떤 시도도 미국의 핵심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필요한 수단으로 격퇴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른바 카터 독트린은 미국이 걸프 지역을 자국의 세력권으로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은 신속전개군(RDF)을 창설하고 디에고 가르시아 기지를 확충하며 걸프 국가들과 군사 협력을 강화한다. 1983년에는 중부사령부(CENTCOM)를 설치하여 중동 지역에 대한 군사적 관여를 제도화한다.
하지만 아랍 군주국들은 미군의 직접적인 주둔에는 신중한 반응을 보인다. 국내 여론과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대신 ‘지평선 너머(over-the-horizon)’ 전략을 통해 평상시에는 미군이 멀리 떨어져 있다가 위기 시에만 신속히 전개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란-이라크 전쟁과 탱커 전쟁
8년 전쟁의 발발과 경과
1980년 9월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시작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걸프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사담은 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이란을 기회로 보고 아랍강 유역과 후제스탄 지역을 점령하려 했다. 또한 아랍 민족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페르시아 이란에 맞선 아랍의 영웅이 되고자 했다.
초기에는 이라크가 우세했지만 이란이 반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장기화된다. 이란은 인간파도 전술로 불리는 대규모 보병 공격을 통해 이라크군을 밀어붙인다. 1982년부터는 이란이 이라크 영토로 역침공하여 바스라 점령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양측 모두 민간 목표물을 공격하는 ‘도시 전쟁’을 벌인다. 이라크는 스커드 미사일로 이란 도시들을 공격하고, 이란은 바그다드와 바스라에 로켓포를 퍼붓는다.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사상자가 되는 참혹한 전쟁이 계속된다.
탱커 전쟁과 국제사회의 개입
1984년부터는 양측이 상대방의 석유 수출을 방해하기 위해 유조선을 공격하는 이른바 ‘탱커 전쟁’이 시작된다. 이라크가 이란 유조선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자 이란은 보복으로 쿠웨이트와 사우디 유조선을 공격한다. 이란의 논리는 자국이 석유 수출을 할 수 없다면 다른 걸프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탱커 전쟁은 전 세계 석유 공급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면서 국제사회의 개입을 촉발한다. 1987년 쿠웨이트가 자국 유조선에 미국 국기를 게양해달라고 요청하자 미국은 이를 받아들여 ‘진지한 의지 작전(Operation Earnest Will)’을 개시한다. 미 해군이 쿠웨이트 유조선을 호위하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이란 사이에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다.
1988년 7월 미군함이 이란 민항기를 격추하여 29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군은 이란 전투기로 오인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란은 의도적 공격이라고 반발한다. 이 사건은 이란으로 하여금 전쟁 종료를 결심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걸프 국가들의 이라크 지원
전쟁 기간 동안 아랍 걸프 국가들은 명목상 중립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이라크를 적극 지원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이라크에 총 6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지원하고, 자국 영공과 영해를 이라크의 석유 수출 경로로 제공한다.
이러한 지원의 배경에는 이란 혁명의 확산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걸프 아랍 군주국들은 이란의 혁명 이념이 자국의 시아파 소수 집단이나 정치적 반대 세력에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바레인은 인구의 70%가 시아파였고, 쿠웨이트와 사우디 동부 지역에도 상당한 시아파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은 이란의 보복을 불러일으킨다. 이란은 쿠웨이트와 사우디 시설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하고, 메카 순례 기간 중 시위를 조직하여 사우디 당국과 충돌한다. 1987년 메카에서 발생한 시위와 충돌로 400여 명이 사망하면서 이란-사우디 관계가 완전히 결별된다.
걸프협력회의(GCC)의 창설과 발전
집단 안보 체제의 필요성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아랍 걸프 국가들은 집단 안보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개별 국가로는 이란이나 이라크 같은 대국에 맞설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확산된다. 또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공산주의 위협도 가시화되면서 서구와의 협력도 필요했다.
1981년 5월 25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UAE, 오만 등 6개국이 리야드에서 걸프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 GCC) 창설을 선언한다. 이 기구의 목적은 “회원국 간의 조정, 통합, 협력을 달성하여 모든 분야에서 단결을 이루는 것”이었다.
GCC는 표면적으로는 경제 협력 기구로 출발했지만 실제로는 안보 협력이 주된 목적이었다. 창설 선언문에서는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지만, 곧이어 집단 방위 협정과 공동 방위력 구축 계획이 발표된다.
제도적 발전과 한계
GCC는 최고회의, 각료이사회, 사무국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제도적 틀을 구축한다. 최고회의는 6개국 국가원수들로 구성되어 최고 의사결정 기구 역할을 하고, 각료이사회는 외무장관들이 참여하여 실무를 담당한다. 사무국은 리야드에 설치되어 상설 업무를 처리한다.
경제 분야에서는 관세 동맹 구축, 공동 시장 설립, 단일 통화 도입 등의 야심찬 계획을 발표한다. 1983년에는 역내 무역에서 관세를 폐지하고, 2003년에는 관세 동맹을 완성한다. 2008년에는 공동 시장이 출범하여 상품, 자본, 서비스,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허용된다.
하지만 정치적 통합은 매우 제한적이다. 각국의 주권을 존중한다는 원칙 하에 초국가적 기구의 설립은 신중하게 접근한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배적 지위로 인해 다른 회원국들이 견제 심리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우디는 GCC 전체 GDP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영토와 인구 면에서도 압도적 우위에 있어 다른 회원국들의 우려를 샀다.
반도의 방패와 군사 협력
1984년 GCC는 ‘반도의 방패(Peninsula Shield Force)’라는 공동 방위군을 창설한다. 초기에는 7,000명 규모의 상징적 부대였지만 점차 확대되어 현재는 40,000명 규모의 다국적군으로 발전한다. 사령부는 사우디 동부 하프르알바틴에 설치되고 사우디가 주도적 역할을 한다.
반도의 방패는 2011년 바레인의 시아파 시위 진압에 투입되면서 실전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GCC의 한계도 드러난다. 바레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시위대를 진압한 것이지만, 이는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짓밟은 것이라는 국제적 비판을 받는다.
군사 협력의 핵심은 무기 체계의 표준화와 공동 방공망 구축이다. 걸프 국가들은 대부분 미국제 무기를 도입하여 상호 운용성을 높이려 한다. 또한 AWACS 조기경보기와 패트리어트 미사일 시스템을 도입하여 이란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한다.
원유 시큐리티 딜레마와 지정학적 경쟁
에너지 안보의 이중 딜레마
걸프 지역의 근본적 안보 딜레마는 에너지 자원에서 기인한다.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는 이들 국가에게 막대한 부와 국제적 영향력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외부 침입의 유혹을 증가시키는 취약 요인이기도 하다. 이른바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 현상이 안보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걸프 국가들은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는 렌티어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석유 시설의 안전이 국가 존립과 직결된다. 석유 생산 시설, 정제소, 수출 터미널, 송유관 등의 인프라가 공격받으면 국가 경제가 마비될 수 있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 전 세계 석유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다.
이러한 취약성 때문에 걸프 국가들은 강력한 보호자가 필요하지만, 외부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은 또 다른 딜레마를 만든다. 미군 주둔은 안보를 보장해주지만 국내 정치적 정당성에는 부담이 된다. 특히 이슬람 보수 세력과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외국군 주둔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란의 비대칭 전략
이란은 재래식 군사력에서 미국과 GCC에 열세이므로 비대칭 전략을 채택한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 대리 세력을 통한 간접 공격, 사이버 공격, 테러 등이 주요 수단이다. 이러한 전략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의 핵심적 전략 자산이다. 폭이 최대 60km에 불과한 이 해협을 통해 전 세계 석유 운송량의 20% 이상이 통과한다. 이란은 해협 양쪽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소형 고속정을 이용한 게릴라 해전 전술을 개발한다. 2019년과 2020년에는 실제로 유조선들을 공격하여 긴장을 고조시킨다.
이란은 또한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예멘의 후티 반군,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등 지역 내 대리 세력들을 지원한다. 이들 세력은 이란의 직접적 개입 없이도 이란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상대방을 압박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예멘 후티들의 사우디 공격은 이러한 대리전의 대표적 사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대응 전략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도전에 대응하여 자체 방위력 강화와 동맹 확대를 추진한다. 2010년대 들어 연간 군사비가 800억 달러를 넘어서며 세계 3위의 무기 수입국이 된다. F-15 전투기, 패트리어트 미사일, THAAD 미사일 방어 시스템 등 최신 무기 체계를 대량 도입한다.
특히 미사일 방어에 집중 투자한다. 이란이 보유한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다층 방어망을 구축한다. 단거리 방어용 패트리어트, 중거리 방어용 THAAD, 장거리 방어용 이지스 시스템을 조합하여 포괄적 방어 능력을 갖추려 한다.
대외적으로는 반이란 동맹 구축에 적극 나선다. 이집트, 요단, 모로코 등 아랍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최근에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도 모색한다. 2020년 아브라함 협정으로 UAE와 바레인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걸프 전쟁과 미국 패권의 확립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은 걸프 안보 체제에 근본적 도전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고 아랍 세계의 맹주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쿠웨이트 병합을 시도한다.
이라크의 주장은 쿠웨이트가 역사적으로 이라크 바스라 지역의 일부였으며, 석유 가격 하락을 위한 과잉 생산으로 이라크 경제에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루마일라 유전에서 이라크 몫의 석유를 불법 채취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경제적, 지정학적 이익이었다. 쿠웨이트를 병합하면 이라크는 세계 2위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게 되고, 페르시아만에서 더 긴 해안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쿠웨이트가 이란-이라크 전쟁 중 제공한 140억 달러의 차관도 탕감할 수 있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과 이라크 축출
미국은 즉시 이라크 철군을 요구하며 경제 제재와 함께 대규모 군사력을 걸프에 파견한다. ‘사막의 방패 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50만 명의 다국적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전개된다. 이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큰 규모로 해외에 파병한 것이었다.
1991년 1월 17일 시작된 ‘사막의 폭풍 작전’은 현대전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5주간의 공습으로 이라크군의 방공 체계와 지휘 체계를 무력화시킨 후, 100시간의 지상전으로 쿠웨이트를 해방시킨다. 정밀 유도 무기, 스텔스 항공기, GPS 등 첨단 기술의 위력이 압도적으로 입증된다.
전쟁의 결과는 걸프 지역의 힘의 균형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이라크는 경제 제재와 무기 금수 조치로 지역 강국 지위를 상실하고, 미국은 걸프의 확실한 패권국으로 자리잡는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이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대폭 확대한다.
이중 봉쇄 정책의 시행
걸프 전쟁 후 미국은 이란과 이라크를 동시에 견제하는 ‘이중 봉쇄(dual containment)’ 정책을 추진한다. 두 나라 모두 걸프의 현상 변경을 시도하는 수정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경제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가한다.
이라크에 대해서는 유엔 경제 제재를 유지하면서 북위 36도선 이북과 북위 32도선 이남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다. 또한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감시하기 위해 유엔 사찰단을 파견한다. 이러한 조치들로 이라크는 사실상 반쪽 국가로 전락한다.
이란에 대해서는 핵 개발과 테러 지원을 이유로 경제 제재를 지속한다. 이란 제재법(ISA)을 통해 이란과 거래하는 제3국 기업들에도 2차 제재를 가한다. 군사적으로는 걸프 지역에 쌍중 봉쇄(dual containment) 체제를 구축하여 이란의 팽창을 저지한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변화
이라크 체제 붕괴와 세력 공백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는 걸프 지역의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동안 이란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이라크가 사실상 소멸되면서 이란의 지역 내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된다.
새로 출범한 이라크 정부는 시아파가 주도하게 되면서 이란과 가까워진다. 누리 알 말리키 총리는 이란과의 협력을 대폭 확대하고, 미국의 이란 제재에도 불구하고 이란과의 경제 관계를 유지한다. 이는 걸프 아랍 국가들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이었다.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들도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확대한다. 바드르 조직, 마흐디 군단, 아사이브 아흘 알 하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명목상 이라크 정부군에 편입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지휘를 받는다.
아랍의 봄과 지역 질서 재편
2011년 아랍의 봄은 걸프 지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바레인에서는 시아파 다수가 수니파 왕정에 맞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GCC군이 진압에 나선다. 이는 종파 갈등이 정치적 갈등과 결합하는 새로운 양상이었다.
시리아 내전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리전 성격을 띤다. 사우디는 수니파 반군을 지원하고 이란은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직접적인 군사 대결을 벌인다. 2015년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예멘에서도 2014년 이란이 지원하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점령하자 사우디아라비아가 군사 개입에 나선다. 2015년부터 시작된 예멘 전쟁은 사우디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막대한 군사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후티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우디 영토에 대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지속되고 있다.
카타르 위기와 GCC 분열
2017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 UAE, 바레인, 이집트가 카타르에 대한 봉쇄 조치를 단행하면서 GCC 내부 분열이 표면화된다. 이들은 카타르가 테러를 지원하고 이란과 너무 가까워졌다고 비난하며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경제 봉쇄를 가한다.
카타르 위기는 GCC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낸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를 때 집단 행동을 취하기 어렵다는 구조적 문제가 노출된 것이다. 카타르는 터키와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봉쇄에 맞서고, 오만과 쿠웨이트는 중재 역할을 시도한다.
2021년 1월 사우디 주도로 카타르 봉쇄가 해제되었지만 GCC 내 신뢰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UAE와 카타르는 여전히 지역 이슈에서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GCC의 집단 행동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현재의 걸프 안보 환경
이란 핵 프로그램과 긴장 고조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 협정(JCPOA)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걸프 지역의 긴장이 다시 높아진다. 미국의 ‘최대 압박’ 정책으로 이란에 대한 제재가 강화되고, 이란은 핵 협정 의무를 단계적으로 위반하며 맞선다.
2019년에는 사우디 아람코 석유 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발생한다. 예멘 후티군이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미국과 사우디는 이란의 직접적 개입을 의심한다. 이 공격으로 사우디 석유 생산량의 절반이 일시 중단되면서 국제 유가가 급등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란과의 핵 협상 재개를 시도했지만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란의 핵 개발이 계속 진전되면서 걸프 국가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체 핵 개발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에너지 전환과 새로운 도전
기후 변화 대응과 에너지 전환은 걸프 국가들에게 새로운 안보 도전이 되고 있다. 전 세계가 탈탄소 정책을 추진하면서 석유 수요 감소가 예상되고, 이는 걸프 국가들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비전 2030’을 통해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경제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개발, 관광업 육성, 제조업 확대 등을 통해 포스트 오일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UAE도 ‘에너지 전략 2050’을 통해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50%까지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사회적 불안정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청년 실업률이 높고 사회 복지에 대한 의존도가 큰 상황에서 경제 구조 조정은 정치적 도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결론
페르시아만은 풍부한 에너지 자원으로 인해 20세기 후반부터 국제 정치의 핵심 무대가 되어왔다. 이 지역의 안보 구조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역 패권 경쟁, GCC를 통한 아랍 국가들의 집단 안보 노력, 그리고 미국의 패권적 개입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이 지역 질서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친미 성향의 샤 체제가 반미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걸프의 세력 균형이 근본적으로 변화했고, 이는 이란-이라크 전쟁, GCC 창설, 미국의 직접적 군사 개입으로 이어졌다. 이후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아랍의 봄 등을 거치면서 지역 질서는 지속적으로 재편되어왔다.
현재 걸프 안보의 가장 큰 도전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과 지역 내 영향력 확대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 레바논에서 형성된 ‘시아파 초승달’은 수니파 아랍 국가들에게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걸프 국가들은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군사 안보 개념만으로는 걸프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에너지 전환, 기후 변화, 경제 다변화, 사회 변화 등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걸프 국가들은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지역 안정을 유지하는 복합적 전략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이란을 포함한 모든 걸프 국가들이 참여하는 포용적 안보 협력 체제 구축이 지역 평화의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