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이스라엘 분쟁 70년사: 1948년 전쟁부터 아브라함 협정까지의 변화

중동 지역을 관통하는 갈등의 핵심축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20세기 중동 정치의 중심축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이 갈등은 70여 년 동안 수차례의 전쟁, 무수한 테러와 보복, 그리고 끝없는 평화 협상을 통해 중동 전체의 정치 지형을 결정지어왔다. 이 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서 종교적, 민족적, 이념적 대립이 복합적으로 얽힌 복잡한 갈등이다.

분쟁의 성격도 시간이 흐르면서 크게 변화했다.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둘러싼 실존적 갈등이었다면, 1970년대 이후에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중심이 되었고, 최근에는 이란의 부상과 함께 지역 패권 경쟁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2020년 아브라함 협정으로 일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관계정상화를 이루면서 분쟁 구조에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되고 있다.

분쟁의 기원과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유대인 정착과 아랍인의 반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뿌리는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과 함께 시작된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포그롬(유대인 대학살) 이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본격화되면서 현지 아랍인들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초기에는 유대인 정착민들의 수가 적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1차 대전 후 영국의 위임통치령 시기에 갈등이 본격화된다. 1917년 밸푸어 선언으로 영국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아랍인들의 우려가 현실화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유대인 이민이 급증하면서 토지 소유권, 노동 시장, 정치적 지위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된다. 특히 1929년 헤브론 대학살과 1936-1939년 아랍 대반란은 양측 사이의 불신과 적대감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유엔 분할 결의와 이스라엘 독립 선언

2차 대전 후 홀로코스트의 충격과 함께 유대인 국가 건설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높아진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 결의안은 팔레스타인 전체 면적의 56%를 유대인 국가에, 44%를 아랍인 국가에 할당했다.

아랍측은 이 결의안을 강력히 거부한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던 아랍인들이 더 작은 영토를 할당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또한 유대인들이 배정받은 지역에도 상당수의 아랍인이 거주하고 있어 실제 분할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아랍 국가들은 즉시 전쟁을 선포한다. 이집트, 시리아, 요단, 이라크, 레바논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예상과 달리 이스라엘이 승리한다.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보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난민이 된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시작

1948년 전쟁으로 발생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핵심 쟁점이다. 난민 발생 원인을 두고 이스라엘과 아랍측은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이스라엘은 아랍 지도자들이 주민들에게 일시적으로 피난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아랍측은 이스라엘이 의도적으로 아랍인들을 축출했다고 주장한다.

진실은 아마도 그 중간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스라엘군의 강제 축출이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전쟁에 대한 공포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피난했으며, 또 일부 지역에서는 아랍 지도자들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70여 년이 지났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난민캠프에 정착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영구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난민들의 고통을 장기화시켰다. 현재 팔레스타인 난민과 그 후손은 약 500만 명에 달한다.

1956년 수에즈 위기와 1967년 6일 전쟁

나세르의 등장과 아랍 민족주의 고조

1952년 이집트에서 나세르가 집권하면서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띤다.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 정책을 추진한다. 1955년 체코를 통한 소련 무기 도입,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 등은 모두 서구와 이스라엘에 대한 도전이었다.

1956년 수에즈 위기는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가 이집트를 공동 공격한 사건이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 지역을 공격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공동 압력으로 결국 철수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나세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고 아랍 세계 전체에 반이스라엘 정서가 확산된다.

1960년대 들어 아랍 국가들 사이에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 경쟁이 벌어진다.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국경에서 지속적으로 도발을 감행하고, 이집트는 이에 대응하여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도입한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도 1964년 창설되어 무장 투쟁을 본격화한다.

1967년 6일 전쟁의 전개와 결과

1967년 5월 나세르가 시나이 반도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유엔 평화유지군 철수를 요구하면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다. 이어 이집트가 티란 해협을 봉쇄하여 이스라엘의 홍해 진출을 차단하자 이스라엘은 이를 전쟁 행위로 간주한다.

6월 5일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이스라엘 공군은 기습 공격으로 이집트, 시리아, 요단 공군의 대부분을 지상에서 파괴하여 제공권을 장악한다. 이후 지상전에서도 이스라엘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 불과 6일 만에 전쟁이 끝난다.

전쟁 결과는 중동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을 점령하여 영토가 3배로 확장된다. 특히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점령으로 약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이스라엘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아랍측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랍 민족주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나세르가 완전히 패배하면서 아랍 통합의 꿈이 무너진다. 이후 아랍 정치는 근본적인 재검토를 거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과 석유 파동

사다트의 등장과 전략 변화

1970년 나세르가 사망한 후 집권한 안와르 사다트는 완전히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사다트는 소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미국과의 협력을 추구하는 한편, 제한적 전쟁을 통해 협상 테이블로 이스라엘을 끌어내려는 전략을 수립한다.

사다트의 판단은 이스라엘이 1967년 승리에 도취되어 현상유지에 안주하고 있어 협상 의지가 없으니, 군사적 충격을 가해 협상 필요성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면적 승리는 불가능하더라도 제한적 성과를 통해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973년 10월 6일 유대교 최대 명절인 욤 키푸르(속죄일)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동시에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다.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진격하고, 시리아군은 골란고원을 공격한다. 초기에는 아랍군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이스라엘에 큰 충격을 준다.

전쟁의 경과와 석유 무기화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스라엘이 반격에 나선다. 미국의 대대적인 군사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을 물리치고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며, 이집트전선에서도 수에즈 운하를 건너 카이로 방향으로 진격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련이 이집트를 지원하면서 미소 간 직접 대결 위험이 커진다. 결국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10월 22일 휴전이 성립된다. 군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지만, 아랍측도 초기 성공을 통해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아랍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구 국가들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한다. 이로 인해 국제 유가가 4배로 폭등하면서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준다.

석유 파동은 아랍 국가들에게 새로운 협상력을 제공한다. 서구 국가들은 중동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균형잡힌 접근을 시도한다. 이는 향후 중동 평화 협상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

1977년 11월 19일 사다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중동 정치사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한 사다트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면서도 점령지 반환과 팔레스타인 권리 보장을 요구한다.

사다트의 결단에는 여러 동기가 있었다. 우선 1973년 전쟁으로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한 상황에서 시나이 반도 회수에 집중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또한 경제 위기에 직면한 이집트가 서구의 경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수적이었다.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도 평화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베긴은 강경파 리쿠드당 출신이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화 협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집트와의 단독 평화를 통해 아랍 연합전선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전략적 계산도 있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성과와 한계

1978년 9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캠프 데이비드에서 13일간의 협상이 벌어진다. 사다트와 베긴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기본 원칙에 합의한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완전 철수와 이집트의 이스라엘 승인이다. 이스라엘은 1982년까지 단계적으로 시나이에서 철수하고,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또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5년간의 과도기를 거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한다는 원칙에 합의한다.

1979년 3월 26일 워싱턴에서 정식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이는 아랍 국가가 이스라엘과 맺은 최초의 평화조약으로 중동 정치에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사다트와 베긴은 1978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다.

하지만 협정에는 중대한 한계가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 방안이 구체적이지 않았고, 다른 아랍 국가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집트는 아랍연맹에서 제명되고 아랍 세계에서 완전히 고립된다. 1981년 사다트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하는 것은 이러한 갈등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인티파다

PLO의 부상과 무장 투쟁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는 PLO가 주도하게 된다. 1969년부터 PLO 의장을 맡은 야세르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아랍 민족주의와 구별되는 독립적 이념으로 발전시킨다.

PLO는 1970년대부터 국제 테러를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세계 이슈로 만들려 한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 각종 항공기 납치, 이스라엘과 서구 목표에 대한 공격 등이 이어진다. 이러한 활동으로 PLO는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지만 동시에 테러리스트라는 낙인도 받는다.

1974년 아랍연맹은 PLO를 팔레스타인 인민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로 인정하고, 같은 해 아라파트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는다. “한 손에는 올리브 가지를, 다른 손에는 자유의 총을”이라는 아라파트의 유명한 연설은 PLO의 양면적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레바논 전쟁과 PLO의 시련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면서 PLO는 최대 위기를 맞는다. 이스라엘의 목적은 레바논에 기반을 둔 PLO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었다. 베이루트 포위전 끝에 PLO는 레바논에서 철수하여 튀니지로 본부를 이전해야 했다.

레바논 전쟁은 PLO에게 중대한 교훈을 준다. 아랍 국가들의 지지도 한계가 있고, 무장 투쟁만으로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PLO 지도부의 해외 체류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12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자연발생적인 민중 봉기가 일어난다. 인티파다(Intifada, 떨쳐버리기)라고 불린 이 봉기는 PLO의 지시 없이 현지 주민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돌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이 이스라엘군에 맞서는 모습은 전 세계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오슬로 협정으로 가는 길

인티파다는 양측 모두에게 변화를 강요한다. 이스라엘은 무력으로만으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PLO는 정치적 해결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1988년 PLO는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과 함께 이스라엘 승인을 시사하는 정치적 전환을 단행한다.

1991년 걸프 전쟁 후 변화된 국제 정세도 평화 협상을 촉진한다. 소련 붕괴로 냉전이 종료되고, PLO가 이라크를 지지했다가 아랍 국가들로부터 고립되면서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1991년 10월 마드리드에서 중동 평화회의가 개최되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공식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비록 구체적 성과는 제한적이었지만, 이 회의는 비밀리에 진행된 오슬로 협상의 배경이 된다.

오슬로 협정과 평화 과정의 좌절

오슬로 협정의 성과

1993년 9월 13일 백악관에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PLO 의장 아라파트가 악수하는 장면은 중동 평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노르웨이의 비밀 중재로 성사된 오슬로 협정은 상호 승인과 단계적 평화 구축을 핵심으로 했다.

협정에 따라 PLO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테러를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 인민의 대표로 인정한다. 또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이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기로 한다.

1994년 아라파트가 가자지구로 돌아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27년 만에 팔레스타인 지도자가 팔레스타인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1995년에는 오슬로 2협정으로 서안지구 주요 도시들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된다.

평화 과정의 난관과 좌절

하지만 평화 과정은 처음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양측 극단주의자들이 평화 과정을 방해하기 위해 테러와 폭력을 계속한다. 1994년 헤브론 이브라힘 모스크에서 유대인 정착민이 팔레스타인 기도자들을 총격한 사건, 1995년 라빈 총리 암살 등이 평화 분위기를 악화시킨다.

정착촌 문제도 지속적인 갈등 요인이 된다. 오슬로 협정에서는 정착촌 문제를 최종 지위 협상에서 다루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정착촌이 계속 확장되어 팔레스타인인들의 불만이 높아진다. 이스라엘 정부는 기존 정착촌의 자연 증가는 허용한다고 주장했지만, 팔레스타인측에서는 이를 협정 위반으로 간주했다.

경제적 성과도 기대에 못 미쳤다. 자치정부 수립 후에도 팔레스타인 경제가 크게 개선되지 않자 주민들의 실망이 커진다. 이스라엘의 안보 우려로 인한 통행 제한과 봉쇄 조치가 경제 활동을 크게 제약했다.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의 실패

2000년 7월 클린턴 대통령이 중재한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은 최종 평화 협정을 목표로 했지만 실패로 끝난다. 예루살렘 지위,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국경 획정 등 핵심 쟁점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특히 예루살렘 문제가 최대 걸림돌이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분할 불가능한 영원한 수도라고 주장하는 반면,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요구했다. 종교적 성지인 성전산(하람 알 샤리프) 관리권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2000년 9월 리쿠드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성전산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제2차 인티파다가 시작된다. 이번 인티파다는 1차와 달리 자살 폭탄 테러가 빈발하여 더욱 폭력적이었다. 평화 과정은 완전히 중단되고 양측 간 불신이 극도로 높아진다.

2000년대 이후 새로운 변화

아랍의 봄과 지역 질서 변화

2011년 아랍의 봄은 중동 전체의 정치 지형을 바꾸어놓는다. 이집트와 시리아 등 기존의 반이스라엘 강경 국가들이 내부 혼란에 빠지면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성격도 변화한다.

이집트의 경우 무바라크 축출 후 무슬림형제단이 집권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냉각되었지만, 2013년 시시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후에는 다시 협력 관계를 복원한다. 시리아는 내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적 위협 능력을 상실한다.

반면 이란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된다.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에서 시아파가 집권하고, 시리아 내전에서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레바논 헤즈볼라와 예멘 후티 반군을 통해 이스라엘을 포위하는 ‘시아파 초승달’ 구조가 형성된다.

이란 핵 프로그램과 새로운 위협

이란의 핵 개발은 이스라엘에게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된다.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중동의 군사적 균형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란 핵 시설에 대한 군사 공격도 불사하겠다는 강경 입장을 유지한다.

2015년 이란 핵 협정(JCPOA) 체결로 일시적으로 긴장이 완화되었지만,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협정에서 탈퇴하면서 다시 갈등이 격화된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시리아 진출을 막기 위해 시리아 내 이란 관련 목표물에 대한 공습을 지속적으로 감행한다.

이란 문제는 전통적인 아랍-이스라엘 분쟁과는 다른 새로운 갈등 구조를 만들어낸다. 수니파 아랍 국가들이 시아파 이란에 대한 공통된 우려를 이스라엘과 공유하게 되면서, 과거의 적대 관계가 협력 관계로 전환될 가능성이 열린다.

팔레스타인 내부 분열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이슬람주의 조직인 하마스가 승리하면서 팔레스타인 내부에 새로운 분열이 발생한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무장 저항을 계속 주장하는 반면, 기존의 파타흐는 협상을 통한 해결을 추구한다.

2007년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무력으로 장악하면서 팔레스타인이 서안지구(파타흐)와 가자지구(하마스)로 분할된다. 이러한 분열은 팔레스타인 협상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평화 과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기반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로켓 공격을 지속한다. 이에 대응하여 이스라엘은 2008-2009년, 2012년, 2014년, 2021년 등 여러 차례 가자지구를 대규모 공격한다. 이러한 주기적 충돌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도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트럼프 행정부와 정책 변화

예루살렘 수도 인정과 골란고원 주권 승인

2017년 집권한 트럼프 행정부는 중동 정책에서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2017년 12월 트럼프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한다.

이 결정은 국제법과 유엔 결의에 반하는 것으로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환영 속에 2018년 5월 예루살렘 미국 대사관이 개관한다. 같은 날 가자지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수십 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발생한다.

2019년 3월에는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한다고 발표한다. 골란고원은 1967년 이스라엘이 시리아로부터 점령한 지역으로, 국제사회는 이를 점령지로 간주해왔다. 미국의 주권 인정은 이스라엘의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팔레스타인 배제와 일방적 접근

트럼프 행정부는 PLO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의 관계를 대폭 축소한다. 2018년 팔레스타인 난민을 지원하는 유엔 기구(UNRWA)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워싱턴의 PLO 사무소를 폐쇄한다.

2020년 1월 트럼프는 ‘세기의 거래(Deal of the Century)’라는 이름으로 중동 평화안을 발표한다. 이 계획은 이스라엘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반면 팔레스타인에게는 매우 불리한 내용이었다. 서안지구 정착촌을 이스라엘에 병합하고, 팔레스타인 국가는 서안지구의 일부와 가자지구로 제한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팔레스타인측은 이 계획을 즉시 거부했고,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도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바탕으로 서안지구 병합을 추진하려 했다가 국제적 반발과 아랍 국가들의 압력으로 연기하게 된다.

아브라함 협정과 새로운 전환점

걸프 국가들의 관계 정상화

2020년 8월 UAE가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것은 중동 정치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어 9월에는 바레인이, 10월에는 수단이, 12월에는 모로코가 차례로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에 나선다.

이들 협정은 아브라함 협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 없이도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는 1973년 아랍연맹이 채택한 “토지와 평화”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관계 정상화의 배경에는 이란에 대한 공통된 위협 인식이 있다. 이란의 지역 내 영향력 확대와 핵 개발에 대한 우려가 수니파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략적 협력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또한 팔레스타인 문제가 더 이상 아랍 세계의 최우선 과제가 아니라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했다.

경제적 동기와 실용주의

아브라함 협정에는 경제적 동기도 크게 작용한다. UAE는 이스라엘의 첨단 기술과 금융 서비스에 관심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의 자본과 에너지 자원에 접근하고 싶어했다. 양측 모두 경제적 상호 이익을 통해 관계 발전을 추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모로코의 경우는 서사하라 지역에 대한 모로코 주권을 미국이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수단은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제외되고 경제 제재가 해제되는 대가로 합의에 참여했다. 이는 각국이 자국의 실익을 위해 팔레스타인 연대보다 실용적 선택을 했음을 보여준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에도 아브라함 협정은 유지되고 있다. 바이든은 트럼프의 일방적 친이스라엘 정책에서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아랍-이스라엘 관계 정상화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딜레마

아브라함 협정의 다음 목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참여다. 사우디는 아랍 세계의 맹주로서 다른 아랍 국가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사우디의 참여는 지역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에 개방적이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어느 정도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사우디 내부의 보수적 종교 세력과 국민 여론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대규모 이스라엘 공격과 이에 따른 가자지구 전쟁은 사우디-이스라엘 관계 정상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가 커지면서 아랍 여론이 악화되었고, 사우디로서는 당분간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공개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현재 상황과 미래 전망

팔레스타인 문제의 지속

아브라함 협정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서안지구에서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계속 확대되고 있고, 가자지구는 하마스의 통제 하에 봉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불만과 절망감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2021년과 2023년에 발생한 가자지구 전쟁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여전히 중동 안정의 핵심 변수임을 보여준다. 특히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이에 따른 이스라엘의 대규모 반격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낳으며 국제사회의 우려를 증폭시켰다.

젊은 팔레스타인 세대는 기존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크고, 더욱 급진적인 저항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앞으로 갈등이 더욱 격화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 없이는 중동의 완전한 평화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란 요인의 지속적 영향

이란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수니파 아랍 국가들에게 공통된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 지역 내 대리 세력 확장,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정책은 중동 정치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할 경우 이스라엘은 군사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중동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 요소다. 반대로 이란과의 외교적 해결이 이루어진다면 중동 안보 환경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이란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이스라엘의 안보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시리아 진출을 막기 위해 지속적인 공습을 감행하고 있으며, 이는 더 큰 충돌로 번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새로운 지역 질서의 가능성

아브라함 협정은 중동에 새로운 지역 질서가 형성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스라엘과 수니파 아랍 국가들의 협력이 확대되면서 이란을 견제하는 새로운 축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인 아랍-이스라엘 대립 구도를 수니파-시아파 대립 구도로 재편할 수 있다. 종교적 차이가 지정학적 갈등과 결합하면서 중동 정치가 더욱 복잡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경제적 협력과 기술 교류를 통해 중동이 보다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지역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첨단 기술과 아랍 국가들의 자본과 에너지가 결합하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아랍-이스라엘 분쟁은 1948년부터 현재까지 70여 년 동안 중동 정치의 핵심 축이었다. 이 분쟁은 여러 차례 전쟁과 평화 시도를 거치면서 성격과 구조가 크게 변화했다. 초기의 이스라엘 생존권을 둘러싼 실존적 갈등에서 시작하여,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부상,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오슬로 과정의 시도와 좌절, 그리고 최근의 이란 위협과 아브라함 협정까지 복잡한 궤적을 그려왔다.

분쟁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아랍 국가들이 더 이상 팔레스타인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브라함 협정으로 대표되는 아랍-이스라엘 관계 정상화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분리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배신감을 주지만, 동시에 중동 전체의 안정에는 긍정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한 중동의 근본적 평화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젊은 팔레스타인 세대의 절망과 분노는 새로운 폭력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이란 요인도 지역 안정에 지속적인 도전이 되고 있다.

미래의 중동 평화는 기존의 이념적 대립을 넘어서 실용적 협력을 확대하고, 경제적 상호 의존을 통해 평화의 기반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 협정이 보여준 것처럼 공통의 위협 인식과 경제적 이익은 과거의 적대감을 넘어설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정당한 권리와 염원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평화만이 중동에 진정한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