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의 심장부에서 균열이 벌어지고 있다. 1963년 엘리제 조약 이후 60년간 유럽 통합을 이끌어온 프랑스-독일 축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과 올라프 숄츠 정부 간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차이를 넘어 두 나라의 근본적인 경제 철학과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유로존 거버넌스 개혁을 둘러싼 입장차는 유럽 통합의 미래 방향을 결정할 핵심 변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중심에는 재정준칙 개편, 유로본드 발행, 그리고 남북 격차 해소 방안 등 유럽경제통화연합(EMU)의 구조적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연속된 위기 상황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더욱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으며, 기존의 타협적 해결책으로는 더 이상 봉합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프랑스-독일 축의 역사적 맥락과 변화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 관계는 유럽 통합사의 핵심 동력이었다. 샤를 드골과 콘라트 아데나워로 시작된 이 파트너십은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헬무트 슈미트의 유럽통화제도(EMS) 창설, 프랑수아 미테랑과 헬무트 콜의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이들의 협력은 종종 ‘모터(motor)’ 역할을 해왔으며, 유럽 통합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였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러한 협력 구도에 근본적 변화가 시작되었다. 독일은 재정 건전성과 구조개혁을 강조하는 ‘슈바베 주부(schwäbische Hausfrau)’ 철학을 바탕으로 한 긴축 정책을 주도했다. 반면 프랑스는 성장 중심의 정책과 재정 확대를 통한 경기 부양을 선호했다. 이러한 차이는 그리스 재정위기 대응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으며, 이후 지속적인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앙겔라 메르켈과 니콜라 사르코지, 그리고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 시기에도 이러한 갈등은 계속되었지만, 메르켈의 정치적 영향력과 독일의 경제적 우위로 인해 대체로 독일의 입장이 우세했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 취임 이후 프랑스는 보다 적극적으로 유럽 개혁 의제를 제시하기 시작했고, 이는 독일과의 새로운 갈등 구조를 만들어냈다.
재정준칙 개편을 둘러싼 근본적 대립
유로존 재정준칙은 1997년 안정성장협정(SGP)에 근거해 회원국의 재정적자를 GDP의 3%, 정부부채를 60%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준칙은 제정 당시부터 경직성과 현실성 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으며, 실제로 대부분의 회원국이 이를 준수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재정준칙이 일시 중단되면서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졌다.
프랑스는 기존 재정준칙이 과도하게 경직적이며 경기변동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투자와 소비를 구분하는 ‘황금준칙(golden rule)’ 도입을 주장하며, 기후변화 대응이나 디지털 전환 등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투자는 재정준칙 계산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경기 상황에 따른 탄력적 운용과 국가별 특수성을 반영한 차별적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독일은 재정 건전성이 유로존 안정성의 근간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숄츠 총리는 재무장관 시절부터 ‘검은 영(schwarze Null)’ 정책, 즉 균형예산 달성을 통한 재정 건전성 확보를 핵심 정책으로 추진해왔다. 독일 정부는 재정준칙 완화가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으며, 이는 결국 독일 납세자들의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차는 단순한 정책 선호의 차이를 넘어 두 나라의 경제 구조와 정치 문화의 차이를 반영한다. 독일의 경우 제조업 중심의 수출 경제 구조와 저인플레이션 선호,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재정 보수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 프랑스는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 모델과 케인즈주의적 정책 전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유로본드 발행과 재정연방주의 논쟁
유로존 공동채권, 즉 유로본드(Eurobond) 발행 문제는 프랑스-독일 갈등의 또 다른 핵심 쟁점이다. 프랑스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도입된 차세대EU(NextGenerationEU) 복구기금의 성공을 바탕으로 영구적인 공동채권 체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를 통해 유로존의 재정적 통합을 심화시키고, 위기 시 공동 대응 능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로본드는 이론적으로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규모의 경제를 통해 자금조달 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며, 개별 국가의 신용등급에 상관없이 안정적인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또한 위기 상황에서 투기적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운 취약국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막 역할을 할 수 있다. 남유럽 국가들이 유로본드 발행을 강력히 지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독일은 유로본드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가장 큰 우려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문제다. 공동채권 체계 하에서는 재정 방만 국가들이 독일의 신용도에 ‘무임승차’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독일 국민들의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과도한 재정 통합이 독일 기본법의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어, 법적 제약도 존재한다.
독일 내 정치적 반대도 만만치 않다. 자유민주당(FDP)은 연정 파트너임에도 불구하고 유로본드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야당인 기독민주연합(CDU)과 독일대안당(AfD)도 같은 입장이다. 특히 AfD는 유로본드를 ‘독일 납세자에 대한 수탈’이라고 비판하며 반EU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
남북 격차와 경제적 불균형 심화
유로존 내 남북 격차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구조적 문제지만, 최근 들어 그 심각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 북부 유럽 국가들은 낮은 실업률과 안정적인 재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 남부 국가들은 여전히 높은 실업률과 부채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격차는 단순히 경제적 지표의 차이를 넘어 정치적 긴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남부 국가들은 독일 중심의 긴축 정책이 자국의 경제 회복을 저해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 지속적인 저성장과 높은 부채비율로 인해 유로존 탈퇴 여론이 간헐적으로 제기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경상수지 불균형도 심각한 문제다. 독일은 GDP 대비 7% 내외의 경상수지 흑자를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남부 국가들은 적자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유로존 내에서 독일이 과도한 수출 의존 경제 구조를 유지하면서 다른 회원국들의 성장 기회를 제약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는 이러한 불균형 해소를 위해 독일의 내수 확대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유로존 차원의 최저임금제 도입이나 사회보장제도 통합 등을 통해 사회적 수렴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독일은 이러한 요구를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이며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에너지 위기와 경제 정책 갈등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는 프랑스-독일 갈등에 새로운 차원을 추가했다. 두 나라는 에너지 전환 전략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으며, 이는 경제 정책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은 ‘에너지벤데(Energiewende)’ 정책을 통해 재생에너지 확대와 원자력 발전소 폐쇄를 동시에 추진해왔다. 하지만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인해 에너지 안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는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높은 에너지 비용으로 인해 일부 기업들이 미국이나 아시아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는 ‘탈산업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반면 프랑스는 원자력 발전을 저탄소 에너지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실제로 EU의 택소노미 규정에서 원자력이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으로 분류되는 데 성공했다. 마크롱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 신규 건설을 발표하며 에너지 독립성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독일의 탈원전 정책과는 정반대의 방향이다.
이러한 에너지 정책의 차이는 산업 정책과 경쟁력 확보 전략에서도 갈등을 낳고 있다. 독일은 높은 에너지 비용을 보상하기 위한 산업 보조금 확대를 추진하고 있지만, 이는 EU의 국가보조금 규정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프랑스는 독일의 일방적인 보조금 정책이 공정 경쟁을 저해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디지털 주권과 기술 정책 분기점
디지털 전환과 기술 주권 확보를 둘러싸고도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다른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는 ‘디지털 주권(souveraineté numérique)’을 내세우며 미국과 중국의 기술 기업들에 대한 규제 강화와 유럽 기업들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적극적 산업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AI, 반도체, 클라우드 컴퓨팅 등 핵심 기술 분야에서 유럽의 기술적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대규모 공공 투자와 ‘유럽 챔피언’ 육성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응하여 유럽도 유사한 산업 보조금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독일은 보다 신중한 접근을 보이고 있다. 독일 경제계는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기보다는 ‘디리스킹(de-risking)’ 방식을 통해 점진적으로 의존도를 줄여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특히 독일 자동차 업계는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급격한 디커플링에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EU의 대중국 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는 중국 전기차에 대한 반덤핑 조사나 핵심 기술의 대중 수출 통제 강화를 지지하는 반면, 독일은 이러한 조치들이 독일 기업들에게 역풍을 몰고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방위 산업과 전략적 자율성 논쟁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의 방위 산업 육성과 전략적 자율성 확보가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다른 우선순위와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주창해왔으며,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방위 능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군’ 창설과 유럽 방위산업기지(EDTIB) 강화를 위한 공동 투자 확대를 지속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특히 차세대 전투기(FCAS)와 차세대 전차(MGCS) 공동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과의 협력을 심화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기술적 복잡성과 비용 부담, 그리고 산업적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해 진전이 더디다. FCAS 프로그램의 경우 프랑스의 다쏘와 독일의 에어버스 간 주도권 다툼이 지속되고 있으며, MGCS 프로그램도 독일의 라인메탈과 프랑스의 네크스터 간 협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일은 방위비 지출 확대에는 동의하지만, 프랑스가 추구하는 ‘전략적 자율성’에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독일 정부는 NATO와 미국과의 동맹 관계가 유럽 안보의 근간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유럽만의 독립적 방위 체계 구축보다는 대서양 동맹 강화를 우선시하고 있다.
금융 통합과 자본시장연합 추진
유럽 자본시장연합(CMU) 구축을 둘러싸고도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다른 관점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는 파리를 유럽의 금융 허브로 육성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브렉시트 이후 런던이 떠난 자리를 차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유럽 차원의 금융 규제 통합과 자본시장 통합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유럽예금보험제도(EDIS) 도입과 은행동맹 완성을 통해 금융 통합을 심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럽중앙은행(ECB)의 역할 확대와 디지털 유로 도입을 통해 유럽의 금융 주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반면 독일은 금융 통합에 대해 보다 신중한 접근을 보이고 있다. 특히 EDIS 도입에 대해서는 남유럽 은행들의 부실이 독일 예금자들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은행동맹 완성 이전에 개별 회원국의 금융 시스템 건전성 확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디지털 유로 도입 문제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는 디지털 유로가 유럽의 화폐 주권을 강화하고 미국 달러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는 반면, 독일은 개인정보보호와 은행 시스템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며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농업 정책과 그린딜의 갈등 지점
공동농업정책(CAP) 개편과 그린딜 정책을 둘러싸고도 프랑스와 독일은 미묘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CAP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로서 농업 보조금 유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마크롱 정부는 농민들의 반발을 의식해 급진적인 환경 규제 도입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최근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농민 시위는 이러한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농민 시위가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으로 확산되면서 그린딜 정책의 현실적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농민들은 과도한 환경 규제가 농업 경쟁력을 저해하고 있다며 정책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독일은 환경 정책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농민들의 반발에 직면해 일부 정책을 수정하고 있다. 특히 녹색당이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환경과 경제 성장 간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농업 정책 갈등은 단순히 경제적 이슈를 넘어 정치적 파급효과도 가져오고 있다. 농민들의 불만이 극우 정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는 유럽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민 정책과 사회적 통합 모델
이민 정책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다른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독일은 인구 고령화와 숙련 노동력 부족 문제로 인해 선별적 이민 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숄츠 정부는 ‘숙련이민법’ 개정을 통해 IT, 의료, 엔지니어링 등 핵심 분야의 인재 유치를 확대하고 있다.
반면 프랑스는 공화주의적 통합 모델을 바탕으로 한 보다 엄격한 이민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불법 이민 단속 강화와 동시에 합법적 이민자들의 프랑스 사회 통합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라이시테(laïcité)’ 원칙을 바탕으로 한 세속주의 교육과 가치관 통합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EU 차원의 이민 정책 조율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새로운 이주협정(Migration and Asylum Pact) 이행 과정에서 회원국 간 책임 분담과 관련해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어 조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후 정책과 산업 전환 전략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정책에서도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접근법을 보인다. 독일은 ‘사회생태적 시장경제’를 표방하며 환경과 경제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특히 그린 하이드로젠 기술 개발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한 산업 전환에 집중하고 있다.
프랑스는 원자력을 활용한 저탄소 전력 공급과 함께 전기차, 배터리 등 미래 모빌리티 산업 육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프랑스 2030’ 계획을 통해 100억 유로를 투자하여 핵심 기술 분야의 경쟁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실제로는 보호주의적 산업 정책의 성격을 띠면서 EU 내 공정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각국이 자국 기업에 유리한 보조금 정책을 경쟁적으로 도입하면서 ‘보조금 경쟁’이 심화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입장차
대미 관계에서도 프랑스와 독일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골리즘’적 외교 노선을 바탕으로 미국과의 독립적 관계를 추구해왔다. 마크롱 대통령은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며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해서도 프랑스는 이를 ‘보호주의 정책’이라고 비판하며 유럽 기업들에 대한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AUKUS 협정으로 인한 프랑스 잠수함 계약 취소 사태는 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반면 독일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보다 협력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안보 분야에서는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경제 분야에서도 미국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독일의 대미 의존도는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대미 관계에서의 입장차는 EU의 대외 정책 조율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 설정,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기술 패권 경쟁 대응 등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어 통일된 EU 입장 수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럽중앙은행 정책을 둘러싼 미묘한 갈등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 정책을 둘러싸고도 프랑스와 독일은 미묘한 입장차를 보인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물가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통화 정책을 선호해왔다. 분데스방크의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은 ECB가 인플레이션 억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프랑스는 경제 성장과 고용 창출을 위해 보다 완화적인 통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최근 인플레이션이 진정되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ECB의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있지만, 독일은 여전히 신중한 접근을 주장하고 있다.
ECB의 양적완화 정책에 대해서도 입장이 다르다. 독일에서는 양적완화가 자산 가격 버블을 야기하고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반면 프랑스는 양적완화를 통한 유동성 공급이 경제 회복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정치적 리더십의 한계와 국내 정치적 제약
마크롱과 숄츠 두 정상의 개인적 리더십도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크롱은 유럽 통합에 대한 비전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지만, 국내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면서 개혁 추진력이 제한받고 있다. 특히 연금 개혁을 둘러싼 국내 갈등과 극우 세력의 부상으로 인해 유럽 정책에 대한 국내 지지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다.
숄츠 총리는 신중하고 실용적인 접근을 선호하지만, 연정 체제의 한계로 인해 대담한 정책 결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자유민주당(FDP)과 녹색당 간의 이념적 차이로 인해 일관된 정책 추진이 쉽지 않다. 에너지 정책, 재정 정책, 이민 정책 등에서 연정 파트너 간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두 나라 모두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의 성장이 유럽 통합에 대한 회의론을 확산시키고 있다. 독일의 AfD와 프랑스의 국민연합은 각각 유로존 탈퇴나 EU 권한 축소를 주장하며 기존 정당들을 압박하고 있다. 이는 정부의 유럽 정책 추진에 정치적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복합적 영향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연속된 위기는 유럽 통합에 상반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공동 위기 대응의 필요성을 부각시켜 차세대EU 복구기금 같은 혁신적 정책 도구의 도입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국의 국가적 이해관계를 더욱 첨예하게 드러내면서 갈등의 소지를 확대했다.
코로나19 초기 대응 과정에서 나타난 ‘백신 민족주의’나 국경 봉쇄 조치들은 유럽 통합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에서도 무기 지원 규모나 난민 수용 부담을 둘러싸고 회원국 간 이견이 지속되고 있다.
에너지 위기는 특히 독일에게 큰 충격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높았던 독일은 급작스러운 공급 중단으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이는 독일의 유럽 정책에서 경제적 실리를 더욱 중시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차세대 리더십과 미래 전망
프랑스와 독일의 차세대 정치 리더들은 기존과는 다른 유럽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에서는 조던 바르델라 같은 젊은 극우 정치인들이 부상하고 있으며, 이들은 유럽 통합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독일에서도 프리드리히 메르츠 같은 보수 정치인이 CDU를 이끌면서 보다 독일 중심적인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젊은 세대의 유럽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브렉시트,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경험한 젊은 세대들은 유럽 통합의 당연함보다는 실용적 효용성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미래 유럽 정책의 방향성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 혁신과 디지털 전환도 유럽 통합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AI, 양자컴퓨팅, 바이오기술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유럽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회원국 간 협력이 필수적이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유럽 통합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대안적 시나리오와 통합 모델
현재의 갈등 구조가 지속될 경우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첫 번째는 ‘최소 공통분모’ 방식의 통합으로, 회원국 간 이견이 큰 분야는 피하고 합의 가능한 영역에서만 제한적 협력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는 통합의 정체를 의미하지만 갈등 최소화라는 장점이 있다.
두 번째는 ‘다속도 통합’ 방식의 본격화다. 통합에 적극적인 국가들끼리 먼저 심화된 협력을 추진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준비가 되었을 때 참여하는 방식이다. 유로존이 이미 이런 모델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분야별 연방주의’ 접근이다. 방위, 에너지, 디지털 등 특정 분야에서는 연방주의적 통합을 추진하되, 다른 분야에서는 정부 간 협력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는 프랑스가 선호하는 접근법에 가깝다.
네 번째는 보다 급진적인 ‘연방 유럽’ 건설이다. 재정연방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연합을 추진하는 것으로, 이는 현재로서는 정치적 실현 가능성이 낮지만 장기적으로는 고려해볼 수 있는 옵션이다.
한국에 대한 시사점과 전략적 함의
프랑스-독일 갈등과 유로존 거버넌스 위기는 한국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선 EU 시장에 대한 접근 전략에서 회원국 간 입장차를 고려한 세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에너지, 디지털, 방위산업 등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어 이를 활용한 협력 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원자력 기술은 프랑스의 원전 르네상스 정책과 연계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한국의 재생에너지 기술이나 그린 하이드로젠 기술은 독일과의 협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배터리나 반도체 분야에서는 양국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삼각 협력의 가능성도 있다.
국제 정치적으로는 미-중 경쟁 구도에서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가 한국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한국이 중견국 외교를 통해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 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금융 분야에서는 유럽 자본시장연합 구축 과정에 한국 금융기관들의 참여 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 간 자본 흐름에서 한국이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
프랑스-독일 축의 균열과 유로존 거버넌스 위기는 유럽 통합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낸다. 60년간 유럽 통합을 이끌어온 양국의 협력 모델이 근본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정책 차이를 넘어 유럽 통합의 미래 방향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재정준칙 개편, 유로본드 발행, 남북 격차 해소 등 핵심 쟁점들을 둘러싼 갈등은 유럽연합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회원국 간 이해관계의 충돌이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연속된 위기는 유럽 통합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각국의 국가적 이기주의를 부각시키기도 했다. 차세대EU 복구기금 같은 혁신적 정책 도구가 도입되었지만, 이것이 영구적인 제도로 정착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미래의 유럽 통합은 기존의 ‘더 많은 통합’이라는 단선적 발전 모델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인 접근법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다속도 통합이나 분야별 연방주의 같은 새로운 모델들이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역할과 관계도 재정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을 비롯한 외부 국가들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새로운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제공한다.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추구와 다원화된 파트너십 모색은 한국 외교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지만, 동시에 보다 정교하고 세밀한 전략이 필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유럽 통합의 미래는 이러한 내부적 갈등과 외부적 도전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