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에서 터진 EU 내분 – 러시아 제재와 중동 갈등 속 유럽의 선택

2025년 6월 2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가 화기애애한 협력보다는 날선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며 끝났다. 러시아에 대한 18차 제재, 중동 정세 대응, 우크라이나 가입 문제 등 굵직한 현안들을 두고 27개 회원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면서, 유럽 통합의 한계가 다시 한번 드러났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의 제재 거부권, EU를 흔들다

이번 정상회의 최대 쟁점은 러시아에 대한 18차 제재 패키지였다. EU는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27개국 정상회의에서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제18차 대러 제재 패키지를 논의했으나, 만장일치 찬성에 이르지 못했다.

문제의 핵심은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의 반대였다. 18차 제재 패키지에는 러시아의 해저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 운영사와 거래 금지, 러시아 금융부문 추가 제재 등이 포함됐다고 알려졌는데, 두 국가는 자국의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강력히 반발했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대표는 브뤼셀에서 열린 EU 외무부 장관 회의에서 러시아에 대한 18번째 제재 패키지의 채택을 막았다. 페테르 시야르토 헝가리 외무장관은 부다페스트와 브라티슬라바는 브뤼셀의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단계적 폐지 계획에 대응하여 제재 패키지를 차단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특히 2022년 여름 유럽 연합이 헝가리와 슬로바키아가 예외적으로 러시아 에너지 자원을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제 브뤼셀은 만장일치 결정을 우회하여 가중 다수결을 통해 이 예외 조항을 폐지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 두 국가의 불만 사항이다.

우크라이나 EU 가입, 갈등의 또 다른 축

러시아 제재와 함께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문제였다. 일부 회원국들은 우크라이나의 빠른 가입을 통해 러시아의 팽창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국가들은 절차적 정당성과 기존 후보국들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신중론을 펼쳤다.

발트 3국과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동유럽 국가들은 조속한 가입 절차 진행을 주장한 반면, 독일과 프랑스 등 서유럽 핵심국들은 제도적 준비와 단계적 접근을 강조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EU 내부의 지역적 분열을 다시 한번 부각시켰다.

스페인의 이스라엘 무역협정 중단 제안, 중동 정책 혼란

한편 중동 정세와 관련해서도 EU 내부 갈등이 표면화됐다.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이스라엘과의 무역 협정을 중단할 것을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자행하고 있는 인권 침해 문제를 지적하며, “EU가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면, 지금은 행동할 때”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에 대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은 외교적 중립성과 전략적 안정을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최근 2025년 6월 13일 이스라엘이 테헤란 등 이란 전역의 핵·군사시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이에 이란이 보복반격으로 미사일 공격을 단행한 상황에서 EU의 중동 정책 방향성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나토 정상회의와의 연관성

이번 EU 정상회의는 6월 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 나토 회의에서도 국방비 지출 확대 문제를 놓고 회원국 간 입장 차이가 드러났는데, 특히 스페인은 미국이 요구하는 국방비 지출 GDP 5% 확대안에 대해 강력히 반발한 바 있다.

한국, 일본, 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4개 동맹국이 나토 회의에 불참한 상황에서 서방 동맹체계에도 균열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에너지 정책의 딜레마

EU의 에너지 정책 전환도 이번 회의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 EU 집행위원회는 EU 기업들이 러시아 에너지 공급업체와 맺은 계약을 2027년까지 끊고 미국 등 다른 나라 에너지원으로 바꾸도록 하는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현물 시장 가스 계약은 올해 말까지, 장기 계약은 2027년까지 단계적으로 끊도록 요구할 방침이지만,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그동안 에너지 가격 상승을 우려해 러시아산 가스 제재에 반대해왔다.

실제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전 EU 파이프라인 가스 수입의 40% 이상과 원유의 약 28%를 공급했으나, 지금은 가스 수입 비중이 약 13%, 석유는 3% 아래로 크게 줄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EU는 러시아에서 액화천연가스(LNG)를 더 많이 사들이고 있으며, 지난해에 수입량이 가장 많았다는 상황이다.

이민 정책, 또 다른 분열의 씨앗

이민 정책에서도 회원국 간 입장 차이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독일은 엄격한 이민 통제를 지향하는 반면, 헝가리를 비롯한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현재의 이민 제도 자체에 반대하며 충돌하고 있다.

특히 중동 정세 불안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난민 증가로 이민 압력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EU 차원의 통합된 이민 정책 수립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결론: 통합보다 분열이 깊어지는 유럽

이번 브뤼셀 정상회의는 EU가 직면한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27개 회원국의 만장일치가 필요한 의사결정 구조에서 소수 국가의 거부권 행사가 전체 정책을 좌초시킬 수 있다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헝가리는 이전에도 대러 제재 채택 의사결정 과정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가 막판에 철회하기를 반복해왔지만, 이번에는 슬로바키아까지 합세하면서 제재 패키지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EU가 단순한 경제통합체를 넘어 정치적 통합체로 발전하려면 의사결정 구조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각국의 주권 의식과 국익 추구가 여전히 강한 상황에서 그러한 개혁이 실현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번 정상회의는 EU가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통합된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내부 갈등과 분열을 관리하는 데 급급한 현실을 보여준 셈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동 정세 불안이라는 중대한 도전 앞에서 유럽이 어떤 선택을 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