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러시아 가스 단계적 금지, 유럽 에너지 판도를 바꾸다

2025년 6월 17일, 유럽의 에너지 역사에 또 하나의 분기점이 찍혔다. EU 집행위원회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주간 회의에서 러시아산 화석연료 퇴출을 위한 구체적인 이행 규정을 최종 채택한 것이다. 2028년부터 러시아산 가스와 석유를 완전히 금지한다는 이 결정은 단순한 에너지 정책 변화를 넘어 유럽 대륙의 에너지 안보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을 전망이다.

220억 유로 규모, 러시아에게 가해지는 경제적 타격

이번 조치로 러시아는 연간 약 220억 유로(34조 7천억 원)에 달하는 수출 손실을 입게 된다. 이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다. 러시아 국내총생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에너지 수출에서 EU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이번 결정은 러시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EU의 러시아산 가스 수입량은 35bcm(10억㎥)으로, 이 중 20bcm은 액화천연가스(LNG) 형태이고 나머지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직접 공급된다. 금액으로는 여전히 150억 유로(약 23조 7천억 원)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전 45%였던 것에 비해서는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EU 전체 가스 수입의 19%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단계적 시행으로 충격을 최소화하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번 조치를 단계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우선 6월 17일 규정 채택 이후 체결되는 신규 수입 계약은 내년 1월 1일부터 즉시 금지된다. 이는 규제 시행 직전 대량 계약 체결을 방지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다.

기존 1년 미만의 단기 계약은 2026년 6월 17일부터 수입이 중단되며, 장기 계약은 2027년 12월 31일까지 모두 해지돼야 한다. 러시아 국적 고객이 EU 내 LNG 터미널을 이용하는 것도 내년 1월부터 금지된다.

이러한 단계적 접근은 회원국들이 대체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면서도 러시아에게는 명확한 신호를 보내는 전략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각국의 에너지 다각화 이행 계획이 핵심

EU 회원국들은 2028년 1월부터 시행될 러시아산 가스·석유 금지에 대비해 ‘국가별 에너지 다각화 이행 계획’을 2026년 3월까지 집행위에 제출해야 한다. 이 계획에는 러시아산 에너지를 대체할 구체적인 공급선과 관련 인프라 확충, 비상 대응 전략 등이 포함돼야 한다.

특히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은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이미 대체 공급원 확보에 나서고 있다. 슬로바키아는 아제르바이잔 국영석유회사 쏘카(SOCAR)와 계약을 체결했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도 대안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미국산 LNG가 주요 대안으로 부상

EU는 러시아산 가스를 대체할 공급원으로 미국산 LNG 확대를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미 미국은 EU 최대 LNG 공급국으로 2024년 기준 45.3%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EU 무역집행위원 마로스 세프코비치는 “LNG와 대두 수입을 통해 미-EU 통상 갈등은 빠르게 해결될 수 있다”고 언급했을 만큼, 미국산 LNG 수입 확대는 에너지 안보와 통상 정책이 맞물린 전략적 선택이다.

또한 카타르와 나이지리아 등 기존 LNG 공급국들로부터의 수입도 확대될 예정이다. 미국과 카타르에서 건설 중인 액화시설이 전 세계 LNG 공급량을 30% 이상 늘릴 것으로 예상되어 공급 부족 우려는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아제르바이잔, 새로운 에너지 파트너로 부상

러시아 대안으로 주목받는 또 다른 국가는 아제르바이잔이다. 남부가스회랑(SGC) 프로젝트를 통해 아제르바이잔의 샤데니즈 가스전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가 튀르키예를 거쳐 EU로 공급되고 있다. 330억 달러 규모의 이 초대형 사업은 유럽의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EU는 아제르바이잔과 새로운 에너지 공급 협상을 적극 진행하고 있으며, 이는 EU의 에너지 지정학에서 중요한 변화를 의미한다.

재생에너지 확대로 근본적 해결책 모색

EU는 단순히 공급원을 바꾸는 것을 넘어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한 근본적 해결책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2025년까지 태양광 발전설비를 2배로 확대하고, 신축 공공·상업 건축물에 태양광 패널 설치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또한 2030년까지 EU 역내에서 1000만 톤 규모의 수소 생산역량을 갖추고 1000만 톤을 수입하여 고온 생산 등 전력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산업 부문에서의 천연가스 의존도를 낮추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의 반대, 그러나 통과는 무난할 듯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이번 규정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아 단기적 충격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EU 이사회에서는 27개 회원국 중 전체 인구의 65% 이상에 해당하는 15개국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되는 가중다수결 방식을 적용하기 때문에 통과 가능성은 높다고 집행위는 보고 있다.

에너지 무기화에 대한 EU의 단호한 대응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C 위원장은 “러시아는 에너지 공급을 무기화해 EU를 협박해 왔다. 이번 조치는 러시아산 화석연료 시대를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제재를 넘어 에너지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에 대한 EU의 단호한 거부 의사를 보여준다.

EU 에너지 집행위원 댄 요르겐센도 “오늘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매우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다. 이제 우리는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에너지 안보 비상조치와 예외 조항

집행위는 단계적 수입 금지 이행 과정에서 1개 회원국 이상의 에너지 공급 안보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비상조치를 시행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뒀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완전한 탈러시아를 추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회원국들의 에너지 안보를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실용적 접근을 보여준다.

또한 EU는 수입 계약 중도 해지로 인한 법적 분쟁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책을 마련했다. 대러시아 제재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force majeure) 사유로 인정되어 법적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집행위는 설명했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구조적 변화

이번 EU의 결정은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도 큰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러시아는 EU 시장을 잃은 만큼 아시아 시장, 특히 중국과 인도로 수출선을 돌리려 할 것이고, 이는 아시아 지역의 에너지 가격과 공급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미국과 카타르, 아제르바이잔 등 대체 공급국들은 EU라는 거대한 시장을 놓고 경쟁하면서 각자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은 이미 EU의 최대 LNG 공급국으로서 이번 기회를 통해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의 패권을 더욱 공고히 할 가능성이 높다.

2028년, 유럽 에너지 독립의 새로운 출발점

2028년 1월 1일은 유럽 에너지 역사에서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70년 넘게 유지되어온 러시아와 유럽 간의 에너지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단기적으로는 비용 상승과 공급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EU의 에너지 안보를 크게 강화하고, 에너지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려는 시도에 대한 면역력을 기를 것으로 기대된다.

더 나아가 이번 조치는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러시아산 화석연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을 더욱 빠르게 추진하는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EU의 이번 결정은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 그리고 지정학적 독립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통합적 전략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202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포스트 러시아’ 시대의 유럽 에너지 시스템이 어떤 모습을 갖출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