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안보 지형이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흥미로운 방산 뉴스가 들려왔다. 프랑스 항공기업 에어버스가 H145M 경량 군용 헬기로 폴란드 시장에 재진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8년 전 H225M 대형 헬기 계약이 취소된 쓰라린 경험을 딛고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던졌다는 사실이다.
달라진 폴란드 정치 지형, 새로운 기회의 창
폴란드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정치적 환경이다. 2023년 총선에서 도날트 투스크가 이끄는 시민연합당이 승리하며 8년간 집권한 보수 민족주의 법과정의당(PiS)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새로운 투스크 정부는 이전 정권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친유럽 성향이 강한 투스크 총리는 EU와의 협력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으며, 이는 에어버스 같은 유럽 방산업체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실제로 폴란드는 2025년 상반기 EU 의장국을 맡아 “안보, 유럽!”이라는 슬로건 하에 EU 안보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전 보수 정권이 미국 중심의 무기 구매에 집중했다면, 현 정부는 유럽 내 방산 협력과 자주국방 능력 확대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이런 정책 변화는 에어버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H145M, 작지만 강력한 다목적 헬기
에어버스가 제안하는 H145M은 어떤 헬기일까? MBB와 가와사키 중공업이 합작해서 만든 BK-117 경헬리콥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EC135의 확대 개량형으로, 군사용으로 특별히 개조된 버전이다.
H145M은 쌍발 엔진을 탑재하여 각각 570마력을 발생시키며, 최대 10명까지 수송할 수 있다. 사거리는 660km 이상, 최고 고도 5,000m, 최고 속도는 시속 250km에 달한다. 특히 다양한 무장을 장착할 수 있어 경공격 임무부터 훈련, 재난구조, 수색구조, 특수부대 지원 등 광범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헬기의 강점은 다용도성이다. 뒤쪽 문이 열리는 구조로 되어 있어 환자를 쉽게 기내에 실을 수 있어 응급 헬리콥터로도 활용 가능하다. 군사용과 민간용을 오가며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한 헬기 판매가 아닌 생태계 구축 전략
에어버스의 이번 제안에서 눈여겨볼 점은 헬기만 파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에어버스는 민간 시장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폴란드에 130명 이상의 엔지니어를 훈련시켰으며, 폴란드 현지 업체들이 H145 유지보수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갖추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에어버스는 Babcock, CAE와 함께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H145M 헬기와 관련 훈련 서비스를 폴란드 공군에 제공하기로 했다. 에어버스는 플랫폼 설계와 제작을, Babcock은 훈련 교육을, CAE는 시뮬레이션을 담당한다.
이는 단순한 무기 수출이 아니라 장기적인 파트너십 구축을 목표로 한다는 의미다. 폴란드가 원하는 것은 무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체 방산 역량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바꾼 동유럽 안보 환경
이 모든 움직임의 배경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다. 폴란드 국방부는 “우크라이나는 스스로의 자유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자유를 위해서도 싸우고 있다”며 현 사태를 사실상 준전시상태로 인식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폴란드는 EU 내에서 GDP 대비 군사비 지출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안보에 대한 위기감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폴란드 국방부는 작년에 소련 시대의 Mi-2 헬기를 부분적으로 교체할 조종사 훈련용 헬기 24대 구매 계획을 발표했다. H145M은 바로 이런 수요에 부합하는 기종이다.
에어버스의 민간 시장 레버리지 전략
에어버스가 자신 있게 폴란드 시장에 재도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민간 시장에서의 탄탄한 기반 때문이다. 에어버스 헬리콥터스 동유럽 영업 담당 부사장 루도비크 보이스토는 “우리는 폴란드의 핵심 파트너지만, 민간 및 준공공 부문에서 그렇다”고 말했다.
이미 폴란드 민간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헬기를 공급해왔고, 현지 유지보수 체계도 구축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인프라는 군용 헬기 사업에서도 큰 장점이 된다.
NATO 동맹국들의 검증된 선택
H145M의 또 다른 강점은 이미 여러 NATO 동맹국에서 검증되었다는 점이다. 독일, 미국, 영국 등 폴란드의 주요 NATO 및 유럽 동맹국들이 이미 H145M을 다양한 임무에 사용하고 있다.
헝가리는 군대 현대화 프로그램 Zrinyi 2026의 일환으로 에어버스에서 H145M 중형 헬리콥터 20대와 H225M Caracal 기동 헬리콥터 16대를 주문했다. 주변국들이 앞다퉈 선택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방산업체에게 주는 시사점
흥미롭게도 폴란드는 한국과도 깊은 방산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 K9 자주포 152대에 대한 25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지만, 새로운 투스크 정부가 이를 재검토하겠다고 발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대폴란드 투자는 72.6억 달러(1,280건)에 달하며, 폴란드의 대한국 투자도 8.2억 달러에 이른다. 양국 관계는 단순한 무기 거래를 넘어선 전략적 동반자 관계다.
에어버스의 폴란드 재진입 시도는 한국 방산업체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지 생산 역량 구축, 기술 이전, 장기적 파트너십이 단순한 무기 수출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유럽 방산 자립의 신호탄
결국 에어버스의 H145M 폴란드 진출 시도는 유럽 방산 자립이라는 더 큰 그림의 일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며 유럽 각국은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폴란드는 EU 의장국으로서 유럽의 안보 강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유럽 방산업체와의 협력은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에어버스가 8년 만에 폴란드에 재도전하는 것은 단순한 비즈니스를 넘어 유럽 안보 체계 재편의 상징적 사건이다. 과연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폴란드의 선택이 향후 동유럽 방산 시장의 판도를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