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에 대해 강도 높은 압박을 가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펜타닐 밀수와 불법 이민 문제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멕시코 정치권과 마약카르텔의 연루 의혹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우려가 자리하고 있다. 이번 사안은 단순한 무역 분쟁을 넘어 양국 간 신뢰 관계와 멕시코 내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 외교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트럼프의 관세 카드와 숨겨진 의도
트럼프 대통령은 2월 1일 멕시코산 수입품에 25%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공식적인 명분은 펜타닐 밀수 차단과 국경 보안 강화였지만, 실제로는 멕시코 정치인들의 마약카르텔 연루 의혹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는 강력한 압박 수단이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멕시코 집권당인 모레나(Morena) 소속 정치인들이 마약 조직과 유착됐다는 정황을 제기하며, 멕시코 정부에 “면책 없는 수사와 기소”를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멕시코 내정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국이 이처럼 압박의 수위를 높인 것은 최근 멕시코 내 마약카르텔이 정치권과 사법체계 전반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는 분석에 기반한다.
셰인바움 정부의 강경 대응이 만든 반전
흥미롭게도 멕시코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은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기보다는 오히려 강경한 마약카르텔 소탕 작전으로 응답했다. 전임자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총알이 아닌 포옹” 정책을 포기하고, 직접적인 카르텔 단속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셰인바움 취임 후 첫 100일 동안 전임 대통령보다 100배 많은 무기와 2000배 많은 마약을 압수했고, 6개월 만에 트럼프 1기 전체 기간보다 더 많은 조직범죄 혐의자를 구금했다. 살인 사건은 15% 감소했으며, 이런 성과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은 셰인바움을 “훌륭한 여성”이라고 칭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트럼프는 3월 6일 멕시코에 대한 25% 관세를 4월 2일까지 한 달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셰인바움 대통령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결정했다며, 양국 관계가 “매우 좋다”고 표현했다.
멕시코 마약카르텔의 정치 침투 실상
멕시코에서 마약카르텔과 정치권의 유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멕시코 마약카르텔은 단순한 범죄 조직을 넘어 선거 자금 제공, 공무원 협박, 지방 권력 장악 등 정치 시스템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
최근에는 카르텔이 정치인들을 상대로 한 폭력이 극에 달하고 있다. 2024년 10월에는 한 지방도시 시장이 취임 6일 만에 참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2018년 선거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 68명이 카르텔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멕시코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카르텔을 강력하게 단속하면 보복 폭력이 증가하고, 온건한 접근을 택하면 카르텔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펜타닐 문제가 만든 새로운 압박 구조
미국이 멕시코에 대해 이처럼 강경한 압박을 가하는 근본적 이유는 펜타닐 위기에 있다. 시날로아 카르텔과 할리스코 신세대 카르텔(CJNG)이 중국에서 들여온 화학 원료로 멕시코 내 비밀 공장에서 펜타닐을 대량 제조해 미국으로 밀수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연간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있어, 이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에게 단순한 마약 문제를 넘어 국가 안보 차원의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다. 트럼프는 멕시코 카르텔을 테러단체로 지정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으며, 이는 카르텔과 연루된 모든 개인과 조직을 제재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조치다.
2월 27일 대규모 범죄자 인도의 의미
트럼프의 압박이 구체적 성과로 나타난 것은 2월 27일이었다. 멕시코가 마약카르텔 관련 범죄자 29명을 미국에 전격 인도한 것이다. 이 중에는 코카인과 헤로인을 취급했던 카르텔 수장들과 펜타닐을 미국에 대량 유입시킨 혐의를 받는 용의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1985년 미국 마약단속요원 살인 사건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라파엘 카로 킨테로도 이때 인도되었다. 이는 멕시코가 미국의 관세 압박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양국 관계의 구조적 모순
하지만 이런 일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의 근본적 모순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국은 마약 공급망 차단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지만, 멕시코는 마약 문제의 근본 원인이 미국의 막대한 마약 수요에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멕시코는 무기를 생산하지도 않고, 펜타닐을 소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국의 마약 수요에 따른 범죄로 인해 죽음을 겪는 것은 멕시코”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 수요 억제 없이 공급국만을 압박하는 것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시날로아 카르텔 내분이 가져온 새로운 변수
2024년 7월 시날로아 카르텔의 오랜 지도자 이스마엘 ‘엘 마요’ 잠바다가 미국에서 체포된 사건은 멕시코 마약카르텔 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잠바다 측은 호아킨 ‘엘 차포’ 구스만 측의 기획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카르텔 내부 분쟁이 격화되었다.
시날로아주에서는 ‘로스 차피토스’와 ‘엘 마요’ 파벌 간의 권력 투쟁으로 100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내분은 역설적으로 카르텔의 미국 내 마약 유입 능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멕시코 내 치안 불안을 더욱 악화시켰다.
경제적 압박의 실제 효과
트럼프의 관세 위협은 실제로 멕시코 경제에 상당한 압박을 가했다. 멕시코는 미국의 3번째 무역 적자국으로, 2024년 11월까지 대미 무역흑자가 1,572억 달러에 달한다. 25% 관세가 부과될 경우 멕시코 경제에 미칠 타격은 막대할 수밖에 없다.
특히 중국 기업들이 미국 관세를 우회하기 위해 멕시코에 대거 투자하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관세 위협은 이런 투자 흐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 제조업체들은 멕시코 투자를 재검토하거나 다른 투자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전망과 과제
현재 상황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셰인바움 정부의 강경한 카르텔 소탕 정책이 실제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과가 지속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마약카르텔은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이며, 단기적 성과로 근본적 해결책을 찾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트럼프 행정부도 관세라는 경제적 압박 수단이 복합적인 마약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4월 2일까지 유예된 관세 조치 이후 양국이 어떤 협력 방안을 마련할지가 관건이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이번 사안은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경제적 압박 수단을 외교와 안보 문제 해결의 지렛대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도 미국과의 관계에서 무역과 안보가 연계된 복합적 협상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국내 정치 상황이나 사회 문제가 대외 관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멕시코의 마약카르텔 문제가 미국과의 무역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각국의 내정 안정이 국제 관계에서 점점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이번 갈등은 21세기 국제 관계에서 경제적 상호의존성과 주권적 독립성 사이의 긴장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양국이 서로의 핵심 이익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의 과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협력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