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의장의 핵심 메시지, “방위 분담이 먼저다”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방위 분담 강화가 무역 갈등보다 우선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나토 방위비 압박과 관세 정책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EU가 택한 전략적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유럽연합이 미국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내린 이 결정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현재 EU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안보 위협과 트럼프 행정부의 방위비 증액 요구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코스타 의장의 발언은 EU의 생존 전략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트럼프의 5% 방위비 요구, EU의 현실적 대응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회원국들에게 GDP 대비 5%의 방위비 지출을 요구하면서 유럽은 급격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현재 나토가 권고하는 GDP 대비 2%도 겨우 달성한 상황에서 5%는 상당한 부담이다.
실제로 지난해 EU 회원국들은 평균적으로 GDP의 1.9% 수준인 3345억 달러를 방위비로 지출했다. 이는 2021년 대비 약 30% 증가한 수치지만, 트럼프의 요구에는 여전히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하지만 EU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유럽 회원국들에게 복지 예산의 일부를 국방 예산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EU 국가들은 평균적으로 국민소득 4분의 1을 연금, 의료, 사회보장제도에 지출하고 있는데 그 돈의 일부만 있어도 국방력을 훨씬 더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1200조원 규모 방위력 증강 계획의 실체
EU의 방위 강화 의지는 구체적인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이 발표한 4년간 1200조원 규모의 방위력 증강 계획이 그 증거다.
이 계획에 따르면 각 회원국이 평균적으로 GDP 1.5% 규모의 국방비 증액에 나설 경우 4년 동안 6500억 유로(997조원)의 예산 지출이 증가한다. 여기에 EU 집행위가 장기 예산에서 1500억 유로(230조원)를 회원국의 방위 투자로 대출 지원하여 총 8000억 유로의 ‘재무장 유럽’ 프로젝트가 시동을 걸게 된다.
이를 위해 EU는 현재 3%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회원국의 연 재정적자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방위비 증액을 위해 경제 규칙까지 바꾸겠다는 것은 EU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폴란드의 선도적 역할과 EU 의장국 효과
2025년 상반기 EU 의장국을 맡은 폴란드는 “안보, 유럽!(Security, Europe!)” 슬로건을 내걸며 EU의 안보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폴란드는 이미 GDP의 4.7%를 국방비로 지출하며 트럼프의 요구 수준에 근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폴란드의 적극적인 방위 정책은 다른 EU 회원국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5개국이 유럽의 방위 산업을 강화하기 위해 국방 채권을 발행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특히 한국 방위산업 기업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폴란드는 이스트 쉴드 프로젝트와 한국산 방위 장비의 공동 생산 계획을 통해 한국과의 방위산업 협력을 적극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무역 갈등보다 방위 분담을 우선시하는 이유
코스타 의장이 무역 갈등보다 방위 분담을 우선시하는 배경에는 냉철한 현실 인식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EU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협상을 통해 조정 가능한 영역이다.
반면 안보 문제는 다르다. 러시아의 위협은 현실이고, 미국의 안보 공약 불확실성도 증가하고 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미국 안보 공약의 불확실성”을 거론하며 영국, 프랑스와의 핵 공유 필요성을 제기한 것도 이런 위기감의 반영이다.
EU가 방위 강화를 우선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장기적인 전략적 자율성 확보다.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유럽의 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유럽 방산업계의 대호황 예고
EU의 방위 강화 정책은 이미 시장에 반영되고 있다. 유럽 내 무기 수요 급증 예상으로 현지 주식시장에서 방산업체 주가가 일제히 상승하고 있다.
리서치업체 알파밸류의 사이마 후세인 분석가는 “유럽의 국방 예산이 총 1500억 유로까지 늘어나고 무기와 탄약, 군사 플랫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수 있다”며 “이 부문이 구조적인 상승기에 접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 BAE시스템즈의 찰스 우드번 CEO는 “각국 국방비 지출 증가는 장기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현재까지 글로벌 방산업체들의 실적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 동반자에서 경쟁자로
EU의 방위 강화 정책은 미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과거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경제 발전에만 집중했던 모델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방위 능력을 갖춘 파트너로 거듭나려는 시도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유럽 안보의 유럽화’ 정책과도 맞아떨어진다. 미국이 아시아 지역의 중국 견제에 집중하려면 유럽이 스스로 안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다.
코스타 의장의 발언은 이런 변화하는 대서양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일방적인 의존 관계에서 벗어나 상호 책임을 지는 동반자 관계로의 전환이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과 기회
EU의 방위 강화 정책은 한국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우선 한국 방위산업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폴란드를 비롯한 EU 국가들이 아시아의 신뢰할 만한 방위산업 파트너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폴란드는 한국과의 방위산업 협력을 통해 K2 전차, K9 자주포 등을 도입하고 있으며, 이를 유럽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시에 한국도 방위비 증액 압박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아시아 동맹국들에게도 더 많은 방위비 분담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EU의 사례는 이런 압박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참고 모델이 될 수 있다.
디지털 규제에서도 나타나는 갈등의 복합성
흥미롭게도 EU와 미국의 갈등은 방위와 무역을 넘어 디지털 규제 영역까지 확산되고 있다. EU 의회 내부시장 및 소비자보호위원회 대표단이 워싱턴 방문 중 디지털 규제 정책에 관한 강한 비판을 받은 것이 그 예다.
이는 EU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방위 분담을 우선시하는 이유를 더욱 명확히 해준다. 무역이나 디지털 규제 갈등은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지만, 안보 문제는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결론: 현실주의적 선택의 지혜
코스타 의장의 “방위 강화가 핵심”이라는 발언은 EU의 현실주의적 선택을 보여준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 좋겠지만, 제한된 자원과 시간 속에서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EU가 방위 분담을 우선시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다. 무역 갈등은 경제적 피해를 가져오지만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반면, 안보 위협은 국가의 존립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2025년 EU의 이런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EU가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전략적 행위자로 거듭나려 한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유럽만의 변화가 아니라 전후 70년간 유지되어 온 서구 동맹 체제의 근본적 재편을 의미한다. 한국을 포함한 다른 미국 동맹국들도 이런 변화의 물결에 어떻게 대응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지금, EU의 선택은 하나의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방위 분담 강화를 통한 전략적 자율성 확보라는 EU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따라할 수 있는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