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채권 시장에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동안 절대적 안전자산으로 군림해온 미국 국채의 아성에 도전할 새로운 대안이 주목받고 있는데, 바로 유럽연합(EU)의 유로채다.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를 대체할 투자처를 찾는 가운데, 유로채가 새로운 안전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코로나19가 만든 새로운 기회
EU의 유로채 부상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유럽연합이 코로나19 이후 회원국의 경기 부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앞으로 5년간 8060억유로(약 1082조원) 규모 채권을 발행하기로 했다. 이는 EU가 이처럼 대규모 채권을 발행하는 것은 처음으로, 유럽 통합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EU는 지난해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사회적 채권을 판매하기도 했다. 당시 170억유로 규모로 발행한 사회적 채권에는 2330억유로에 달하는 수요가 몰렸다. 이는 투자자들이 EU 채권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미국 중심 금융질서에 대한 도전
블룸버그는 “미국 중심의 세계 금융시장에 유럽이 도전장을 내밀었다”며 “이는 달러 대신 유로화로 투자자를 유인하려는 EU의 첫 번째 기습공격”이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외신들은 EU 채권이 안전자산으로서 몇 년 안에 미국 국채의 경쟁상대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EU 차원의 채권 발행은 단순한 자금 조달을 넘어 유럽 통합과 유로화의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미국 달러와 미국 국채가 독점해온 글로벌 안전자산 시장에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한 셈이다.
유로본드의 복잡한 역사
사실 유로본드라는 개념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EU는 2012년에도 유로존의 재정위기 당시 ‘유로본드’라는 이름으로 채권 발행을 검토했다.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채무불이행 위기에 처한 EU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독일이 강력히 반대해 무산됐다.
공동채권 발행에 대한 주장은 주로 큰 피해를 겪은 남부유럽 국가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북부유럽 국가들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독일 등 재정 건전성이 우수한 국가들은 회원국들의 도덕적 해이를 우려해 공동채권 발행에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규모 부족이라는 현실적 한계
그러나 EU 유로채가 미국 국채를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아직 여러 한계가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규모다. 금년 유로존 주요국 국채 발행액은 1.25조 유로 상당으로 예상되고 있으나, 경제 성장력 약화, 트럼프 관세 대응, 정치적 갈등 등에 따라 당초 예상보다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하기 곤란하다.
미국의 정부부채는 2024년 1월에 36조2202억 달러로 증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EU 유로채의 규모는 여전히 미국 국채 시장에 비해 상당히 작은 수준이다. 이는 유로채가 미국 국채만큼의 유동성과 시장 영향력을 갖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2025년 채권 시장 전망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크고 미 금리의 절대적 상대적 고수준이 유지되면서 글로벌 채권 자금의 미국 선호가 지속될 소지가 있어, 당분간은 미국 국채의 우위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CB의 통화정책기조 변화, 자산매입 유연성 제약 등으로 유로지역 주변국 스프레드 확대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유로채 시장의 안정성에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투자자들의 새로운 선택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은 미국 국채 일변도에서 벗어나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외화 명목 채권(유로본드) 발행 총액은 약 340억 달러로 작년 동기 대비 12% 증가했다는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지정학적 리스크가 증가하고 미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위험을 분산할 새로운 안전자산을 찾고 있다. EU 유로채는 이런 니즈를 충족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럽 통합의 새로운 동력
EU 유로채의 성공은 단순히 금융 시장의 변화를 넘어 유럽 통합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동 채권 발행을 통해 EU 회원국들 간의 경제적 결속력이 더욱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유로본드 반대 국가들도 힘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어, 향후 EU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 변화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의 가능성
단기적으로는 규모와 유동성 면에서 미국 국채를 완전히 대체하기 어렵지만, 장기적으로는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EU가 지속적으로 공동 채권 발행을 확대하고, 유로화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다면 글로벌 채권 시장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다.
투자자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고 있다. 미국 국채 중심의 투자에서 벗어나 EU 유로채를 포함한 다각화된 포트폴리오 구성을 고려해볼 시점이다. 물론 여전히 시장 영향력은 제한적이지만, 변화하는 글로벌 금융 환경에서 EU 유로채는 분명 주목할 만한 투자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 국채의 절대적 지위가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신호가 나타나고 있는 지금, EU 유로채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은 투자자들에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