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범죄 뉴스를 접하게 된다. 강도, 사기, 살인, 횡령 등 다양한 범죄가 연일 보도되고, 법원은 가해자에게 징역이나 벌금형을 선고한다. 이처럼 국가가 개인의 범죄행위에 대해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신중하고 엄격한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 형벌은 개인의 생명, 신체, 재산, 자유를 박탈하는 가장 강력한 국가권력의 행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벌권의 행사를 규율하는 법이 바로 형법이며, 그 중심에는 죄형법정주의라는 위대한 원칙이 자리하고 있다.
형법의 본질과 기능
형법은 범죄와 형벌에 관한 법이다. 어떤 행위가 범죄이며, 그에 대해 어떤 형벌을 부과할 것인지를 정하는 법률이다. 형법은 국가의 형벌권을 규율함과 동시에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형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회방위다. 사회에 해로운 행위를 금지하고 처벌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국민의 안전을 보장한다. 동시에 법익보호 기능도 수행한다. 생명, 신체, 재산, 명예 등 중요한 법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처벌하여 개인의 권리를 보호한다.
형법은 또한 인권보장의 기능도 갖는다. 죄형법정주의를 통해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막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한다. 이는 형법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형법은 처벌법인 동시에 보장법이기도 하다.
응보와 예방도 형법의 중요한 기능이다. 범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부과하여 정의를 실현하고(응보), 미래의 범죄를 방지한다(예방). 예방은 다시 일반예방(사회일반에 대한 위하효과)과 특별예방(범죄자 개인에 대한 재범방지)으로 나뉜다.
죄형법정주의의 원리
죄형법정주의는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는 라틴어 격언으로 표현되는 형법의 근본원리다. 국가가 개인을 처벌하려면 반드시 미리 법률로 범죄와 형벌을 명확히 정해두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죄형법정주의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베카리아와 포이어바흐 등에 의해 확립되었다. 절대왕정 시대 자의적이고 가��혹한 형벌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원리로 발달했다.
성문법주의
죄형법정주의의 첫 번째 요구는 성문법주의다. 범죄와 형벌은 반드시 국회가 제정한 성문법률에 규정되어야 한다. 관습법이나 조리, 판례법만으로는 범죄를 구성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성문법 국가이므로 이 원칙이 자연스럽게 관철된다. 다만 백지형법규정의 경우 위임의 범위와 한계가 문제된다. 형법에서 기본적 사항을 정하고 세부사항을 하위법령에 위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범죄의 핵심요소까지 위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소급효 금지의 원칙
범죄와 형벌을 정한 법률은 그 시행 이전의 행위에 소급적용될 수 없다. 행위 당시에는 적법했던 행위를 나중에 만든 법률로 처벌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
다만 행위 후 법률이 변경된 경우에는 행위시법과 재판시법 중 피고인에게 유리한 법을 적용한다. 이는 소급효 금지 원칙의 예외로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경우에만 소급효을 인정하는 것이다.
명확성의 원칙
범죄와 형벌을 정한 법률조문은 명확해야 한다. 누구나 법조문을 읽고 무엇이 금지되는 행위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명확해야 한다.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규정은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
명확성 원칙은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보장한다. 국민은 자신의 행위가 처벌받을지 여부를 미리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법집행기관의 자의적 해석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법조문이 지나치게 구체적이면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 따라서 일정한 추상성은 불가피하며, 해석을 통해 구체화하는 것이 허용된다. 다만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는 유추해석은 금지된다.
유추해석 금지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추해석은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 법조문의 가능한 의미 범위를 넘어서는 확장해석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형법조문을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엄격해석의 원칙으로 나타난다.
다만 피고인에게 유리한 유추해석은 허용된다. 또한 축소해석이나 목적론적 제한해석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법조문의 가능한 의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범죄론의 기본 체계
범죄론은 어떤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는지를 판단하는 이론적 체계다. 전통적으로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 책임의 3단계로 구성되며, 이 세 요소가 모두 충족되어야 범죄가 성립한다.
구성요건과 구성요건해당성
구성요건은 범죄의 유형을 기술한 법조문상의 규정이다. 예를 들어 형법 제250조 제1항의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에서 “사람을 살해한”이라는 부분이 살인죄의 구성요건이다.
구성요건해당성은 구체적 행위가 추상적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범죄성립의 첫 번째 단계로서, 행위가 형법조문에 규정된 범죄유형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한다.
구성요건은 여러 요소로 구성된다. 행위주체, 행위객체, 행위, 결과, 인과관계 등이 기본적 요소이고, 범죄에 따라 특별한 요소가 추가되기도 한다.
행위주체는 범죄를 실행하는 자를 말한다. 대부분의 범죄는 누구나 주체가 될 수 있지만(일반범),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진 자만이 주체가 될 수 있는 범죄도 있다(신분범). 공무원의 직권남용죄나 의사의 낙태죄 등이 신분범의 예다.
행위객체는 범죄행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물건을 말한다. 살인죄의 객체는 사람이고, 절도죄의 객체는 타인의 재물이다. 행위객체와 보호법익은 구별되는 개념으로, 보호법익은 형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추상적 이익이다.
위법성과 위법성조각사유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라도 위법하지 않으면 범죄가 되지 않는다. 위법성은 행위가 전체 법질서에 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성요건해당성이 인정되면 위법성이 추정되지만, 위법성조각사유가 있으면 위법성이 조각된다.
정당방위는 가장 대표적인 위법성조각사유다.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않는다. 야간에 침입한 절도범을 막기 위해 폭행을 가하는 경우가 그 예다.
긴급피난도 중요한 위법성조각사유다.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않는다. 화재 시 타인의 집에 무단침입하여 피난하는 경우 등이 해당한다.
피해자의 승낙도 위법성을 조각할 수 있다. 처분 가능한 법익에 대한 진정한 승낙이 있으면 위법성이 조각된다. 권투경기에서의 상해나 의료행위 등이 그 예다.
책임과 책임조각사유
책임은 범죄행위에 대해 행위자를 비난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위법한 행위를 했더라도 행위자에게 비난가능성이 없으면 형벌을 부과할 수 없다.
책임능력은 책임의 전제조건이다.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책임능력이다. 미성년자나 정신장애인은 책임능력이 없거나 제한된다.
형법은 14세 미만의 행위는 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14세 미만은 절대적으로 책임능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14세 이상 19세 미만의 소년에 대해서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
심신장애로 인한 책임조각도 중요하다. 심신상실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고, 심신미약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 심신상실은 정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상태이고, 심신미약은 그 능력이 현저히 감퇴된 상태다.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는 특별한 문제를 제기한다. 술을 마셔서 심신상실 상태가 된 후 범죄를 저지른 경우, 범행 당시에는 책임능력이 없지만 음주 당시에는 책임능력이 있었다. 이런 경우 음주시점을 기준으로 책임을 묻는다.
고의와 과실
범죄가 성립하려면 행위자에게 고의나 과실이 있어야 한다. 고의와 과실은 책임의 핵심 요소로서, 행위자의 주관적 태도를 나타낸다.
고의의 개념과 종류
고의는 죄가 되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실현을 의욕하는 심리상태다. 단순히 결과를 예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실현을 의욕하거나 적어도 용인하는 의사가 있어야 한다.
고의는 확정적 고의와 미필적 고의로 구분된다. 확정적 고의는 범죄사실의 실현을 확실히 의욕하는 경우이고, 미필적 고의는 범죄사실이 발생할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그 발생을 용인하는 경우다.
미필적 고의와 인식 있는 과실의 구별은 실무상 중요한 문제다. 둘 다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미필적 고의는 결과발생을 용인하지만, 인식 있는 과실은 결과발생을 신뢰하지 않는다.
과실의 개념과 종류
과실은 주의의무를 위반하여 죄가 되는 사실을 발생시키는 심리상태다. 예견 가능했던 결과를 예견하지 못했거나, 예견했으면서도 회피하지 못한 경우에 인정된다.
과실은 무인식과실과 인식과실로 구분된다. 무인식과실은 결과발생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 경우이고, 인식과실은 결과발생을 예견했지만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경신한 경우다.
과실범은 법조문에 명시된 경우에만 처벌된다. 모든 범죄에 과실범이 있는 것은 아니며, 과실치사상, 업무상과실치사상,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과실 등 특별히 규정된 경우에만 처벌한다.
미수범과 기수범
범죄는 완성 여부에 따라 기수범과 미수범으로 구분된다. 기수범은 범죄가 완성된 경우이고, 미수범은 범죄가 완성되지 못한 경우다.
미수범의 종류
미수범은 착수 여부와 결과발생 여부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된다. 예비는 범죄실행에 착수하기 전 단계의 준비행위이고, 미수는 실행에 착수했지만 범죄가 완성되지 않은 경우다.
미수는 다시 장애미수와 중지미수로 구분된다. 장애미수는 행위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외부적 장애로 인해 범죄가 완성되지 않은 경우이고, 중지미수는 행위자가 자의로 범죄실행을 중지하거나 결과발생을 방지한 경우다.
불능미수는 실행행위가 객관적으로 결과발생이 불가능한 경우다.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죽이려 한 경우나 가짜 총으로 사람을 쏜 경우 등이 그 예다. 불능미수는 위험성이 없으므로 원칙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미수범의 처벌
미수범은 기수범보다 가벌성이 낮으므로 형을 감경할 수 있다. 다만 모든 범죄에 미수범이 있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범죄에 한해 미수범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중지미수의 경우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 이는 행위자의 자발적 중지를 유인하여 법익침해를 방지하려는 정책적 고려에 기초한다.
형법의 현대적 과제
현대 형법은 새로운 유형의 범죄와 사회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보화 사회의 발전에 따른 사이버 범죄, 경제범죄의 복잡화, 국제범죄의 증가 등이 형법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되고 있다.
피해자학의 발전도 형법 이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통적으로 형법은 가해자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피해자의 권리와 보호도 중요하게 고려되고 있다. 피해자의 진술권, 손해배상명령제도 등이 그 예다.
형사정책적 관점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단순한 응보형에서 교정교화와 사회복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전자감독제도, 사회봉사명령, 수강명령 등 새로운 제재수단이 도입되고 있다.
국제형법의 발전도 주목할 만하다. 집단살해죄, 인도에 대한 죄, 전쟁범죄 등 국제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고 있으며, 국제형사재판소를 통한 국제적 처벌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다.
결론
형법은 국가권력의 가장 강력한 수단인 형벌권을 규율하는 법이다. 죄형법정주의라는 확고한 원칙 하에서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면서도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다.
구성요건, 위법성, 책임이라는 3단계 범죄론 체계는 범죄성립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각 단계는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정확하고 공정한 범죄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형법의 궁극적 목표는 정의의 실현이다. 범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부과하여 응보적 정의를 실현하고, 미래의 범죄를 예방하여 사회안전을 도모한다. 동시에 죄형법정주의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한다.
앞으로 형법은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과제에 직면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 사회구조의 변화, 가치관의 다원화 등이 새로운 도전요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도 형법의 기본원리와 가치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형법이 계속해서 정의로운 사회건설의 토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