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제도는 현대 거래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 법률제도다. 개인이 모든 법률행위를 직접 할 수 없는 현실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 법률행위를 하고 그 효과를 자신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대리제도는 거래의 효율성과 편의성을 크게 높인다. 회사의 대표이사가 회사를 위해 계약을 체결하고,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대신해 법률행위를 하며, 변호사가 의뢰인을 위해 소송행위를 하는 모든 경우가 대리제도의 활용이다.
대리의 개념과 본질
대리의 정의와 특징
대리란 대리인이 본인을 위하여 그 권한 내에서 상대방과 의사표시를 주고받음으로써 그 법률효과를 직접 본인에게 귀속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대리의 핵심은 대리인의 행위가 본인에게 직접 효과를 미친다는 점이다.
대리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대리인이 본인을 위한다는 현명(顯名)을 해야 한다. 둘째, 대리인이 대리권 범위 내에서 행위해야 한다. 셋째, 대리인이 상대방과 의사표시를 주고받아야 한다.
대리제도의 본질에 대해서는 대리인의 의사가 중요한지(의들론), 본인의 의사가 중요한지(의사론), 아니면 법률이 인정하는 제도인지(법정론)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통설은 대리를 법률이 인정하는 독립적 제도로 보는 법정론을 취한다.
대리와 유사제도의 구별
대리는 다른 유사제도와 구별해야 한다.
사자(使者)와의 구별
사자는 단순히 본인의 의사표시를 전달하는 역할만 한다. 본인이 이미 형성한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할 뿐,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지 않는다. 반면 대리인은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고 표시한다.
사자의 행위에 하자가 있는 경우 본인의 의사표시에 하자가 있는 것으로 본다. 대리인의 행위에 하자가 있는 경우에는 대리인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대표와의 구별
대표는 법인이나 단체의 기관이 그 법인이나 단체를 위해 행위하는 것이다. 대표기관의 행위는 법인 자신의 행위로 간주된다. 반면 대리는 별개의 인격체인 대리인이 본인을 위해 행위하는 것이다.
대표에서는 대표기관과 법인이 일체관계에 있지만, 대리에서는 대리인과 본인이 별개의 인격체다.
간접대리와의 구별
간접대리는 대리인이 자신의 명의로 상대방과 법률행위를 하고, 나중에 그 권리의무를 본인에게 이전하는 제도다. 영미법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우리 민법상 대리는 직접대리를 원칙으로 한다. 대리인의 행위효과가 본인에게 직접 귀속되며, 별도의 이전행위가 필요하지 않다.
대리권의 발생과 범위
대리권 발생원인
대리권은 법률행위에 의해 발생하는 임의대리권과 법률의 직접적 규정에 의해 발생하는 법정대리권으로 나뉜다.
임의대리권
임의대리권은 본인의 수권행위에 의해 발생한다. 수권행위는 본인이 대리인에게 대리권을 부여하는 일방적 의사표시다. 수권행위는 대리인에게 도달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위임계약과 수권행위는 구별된다. 위임계약은 사무처리를 맡기는 채권계약이고, 수권행위는 대리권을 부여하는 단독행위다. 위임계약이 있어도 수권행위가 없으면 대리권이 없고, 수권행위가 있어도 위임계약이 없으면 사무처리의무가 없다.
법정대리권
법정대리권은 법률의 직접적 규정에 의해 발생한다. 친권자의 미성년자에 대한 대리권, 후견인의 피후견인에 대한 대리권, 법인의 대표기관의 대리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법정대리권은 일정한 신분관계나 지위에서 당연히 발생하므로, 별도의 수권행위가 필요하지 않다.
대리권의 범위
대리권의 범위는 수권행위나 법률의 규정에 의해 결정된다. 대리인은 대리권 범위 내에서만 유효한 대리행위를 할 수 있다.
포괄대리와 개별대리
포괄대리는 일정한 종류의 행위 전반에 대해 대리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재산관리 일체를 위임한다”는 경우가 포괄대리에 해당한다.
개별대리는 특정한 행위에 대해서만 대리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부동산의 매매계약을 위임한다”는 경우가 개별대리다.
기본대리권과 부수적 대리권
기본대리권은 주된 사무처리를 위한 대리권이다. 부수적 대리권은 기본대리권의 행사에 부수하여 인정되는 대리권이다.
예를 들어 부동산 매매의 대리권이 있으면, 그에 부수하여 소유권이전등기를 신청할 대리권도 있다고 본다.
대리행위의 요건과 효과
현명(顯名)
대리인은 본인을 위하여 행위한다는 뜻을 상대방에게 표시해야 한다. 이를 현명 또는 대리의사의 표시라고 한다.
현명은 명시적으로 할 수도 있고 묵시적으로 할 수도 있다. “A를 대리하여”라고 명시하는 것이 명시적 현명이고, 상황상 대리임이 명백한 경우가 묵시적 현명이다.
현명을 하지 않으면 대리가 아니라 대리인 자신을 위한 행위가 된다. 다만 상대방이 대리인이 본인을 위해 행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나 알 수 있었다면 현명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대리권의 존재
대리인은 대리권 범위 내에서 행위해야 한다. 대리권이 없거나 대리권을 벗어난 행위는 무권대리가 된다.
대리권의 존재는 대리행위 시점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대리행위 후에 대리권이 소멸하더라도 그 행위는 유효하다.
대리권의 범위는 외부적 권한과 내부적 권한으로 나뉜다. 외부적 권한은 상대방에 대한 관계에서의 권한이고, 내부적 권한은 본인과의 관계에서의 권한이다. 내부적 권한을 벗어나더라도 외부적 권한 범위 내라면 유효한 대리가 된다.
의사표시의 하자
대리행위에 의사표시의 하자가 있는 경우 그 판단기준이 문제된다.
사기, 강박, 착오 등은 대리인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대리인이 사기를 당했다면 대리행위를 취소할 수 있고, 대리인에게 착오가 있었다면 그를 이유로 취소할 수 있다.
선의·악의, 과실·무과실도 대리인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본인이 악의라도 대리인이 선의라면 선의로 본다.
다만 본인이 특정한 사실을 알면서 대리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경우에는 본인도 그 사실을 안 것으로 본다.
무권대리
무권대리의 개념
무권대리란 대리권이 없는 자가 타인의 대리인으로서 법률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부터 대리권이 없는 경우뿐만 아니라, 대리권을 벗어나거나 대리권이 소멸한 후에 한 행위도 무권대리에 해당한다.
무권대리는 대리의 외관은 있지만 실질적인 대리권이 없는 상태다. 이런 경우 본인, 상대방, 무권대리인 사이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가 문제된다.
무권대리의 효과
본인에 대한 효과
무권대리행위는 원칙적으로 본인에게 효력이 없다. 본인이 대리권을 주지 않았는데 그 효과를 부담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본인이 추인하면 소급적으로 유효하게 된다(민법 제114조). 추인은 본인이 무권대리행위를 승인하는 일방적 의사표시다.
추인권은 본인에게만 있다. 본인의 상속인이나 대리인도 추인할 수 있다. 추인은 무권대리행위를 안 때부터 3개월, 무권대리행위가 있은 때부터 5년 내에 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효과
상대방이 선의인 경우 일정한 보호를 받는다.
첫째, 상대방은 본인에게 추인을 최고할 수 있다(민법 제114조). 추인거절 통지를 받거나 1개월 내에 확답이 없으면 추인을 거절한 것으로 본다.
둘째, 상대방은 추인이 있을 때까지 계약을 철회할 수 있다(민법 제115조). 다만 계약시에 무권대리임을 알았다면 철회할 수 없다.
무권대리인에 대한 효과
무권대리인은 상대방에 대해 이행 또는 손해배상의 책임을 진다(민법 제117조). 상대방은 이행청구권과 손해배상청구권 중 선택할 수 있다.
다만 상대방이 무권대리임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면 무권대리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또한 무권대리인이 행위능력이 없다면 책임을 지지 않는다.
표견대리
표견대리의 의의
표견대리란 대리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리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관이 있을 때, 그 외관을 신뢰한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해 무권대리행위에 대리의 효력을 인정하는 제도다.
표견대리는 무권대리의 한 유형이지만,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유효한 대리와 같은 효력을 갖는다. 이는 거래안전과 상대방 보호를 위한 것이다.
표견대리의 유형
대리권수여의 표시에 의한 표견대리
본인이 대리권을 수여하지 않았음에도 타인에게 대리권을 수여한 것으로 표시한 경우, 그 표시를 믿고 거래한 선의의 상대방은 보호받는다(민법 제126조).
이 유형이 성립하려면 본인의 표시행위, 상대방의 선의, 상대방의 무과실이 필요하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대리권이 있다고 표시했거나 그렇게 믿을 만한 행위를 해야 한다.
권한외의 행위의 표견대리
대리인이 권한 밖의 행위를 한 경우에도 제3자가 대리인에게 그 권한이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표견대리가 성립한다(민법 제127조).
기본대리권이 있는 자가 그 권한을 넘어선 행위를 한 경우에 적용된다. 상대방은 대리인에게 기본대리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권한 범위에 대해 선의·무과실이어야 한다.
대리권소멸 후의 표견대리
대리권이 소멸한 후에도 제3자가 그 사실을 모르고 거래한 경우 표견대리가 성립할 수 있다(민법 제128조).
대리권이 소멸했지만 상대방이 그 사실을 모르고 선의·무과실로 거래한 경우에 적용된다. 대리권 소멸사유를 상대방이 알 수 없었던 경우가 대표적이다.
표견대리의 효과
표견대리가 성립하면 무권대리행위가 유효한 대리행위와 같은 효력을 갖는다. 본인에게 직접 효력이 귀속되고, 본인은 상대방에 대해 계약상 책임을 진다.
본인은 표견대리의 성립을 다툴 수 있지만, 요건이 충족되면 그 효력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본인은 무권대리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대리권의 소멸
임의대리권의 소멸
임의대리권은 여러 사유로 소멸한다.
본인 측 사유
본인의 사망은 대리권을 소멸시킨다. 본인이 파산하거나 후견개시의 심판을 받은 경우에도 대리권이 소멸한다.
본인의 취소나 해지도 대리권 소멸사유다. 본인은 언제든지 대리권을 취소할 수 있다. 다만 위임계약이 있는 경우에는 계약해지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다.
대리인 측 사유
대리인의 사망, 파산, 후견개시의 심판도 대리권을 소멸시킨다. 대리인의 사임도 소멸사유가 된다.
기타 사유
대리권에 기한이나 조건이 있는 경우 그 기한의 도래나 조건의 성취로 소멸한다. 목적달성이나 목적달성 불가능도 소멸사유가 된다.
법정대리권의 소멸
법정대리권은 그 발생원인이 소멸하면 대리권도 소멸한다.
친권자의 대리권은 자녀의 성년, 친권상실, 친권자의 사망 등으로 소멸한다. 후견인의 대리권은 후견의 종료로 소멸한다.
대리권 소멸의 효과
대리권이 소멸한 후에 한 행위는 무권대리가 된다. 다만 대리인이나 상대방이 소멸사실을 몰랐다면 표견대리가 성립할 수 있다.
대리권 소멸을 제3자에게 대항하려면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 특히 계속적 거래관계에서는 거래상대방에게 통지해야 한다.
복대리
복대리의 개념
복대리란 대리인이 자기의 권한 내에서 제3자를 선임하여 본인을 위한 대리행위를 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복대리인은 본인을 직접 대리한다.
복대리에서는 본인, 대리인, 복대리인, 상대방의 4자 관계가 형성된다. 복대리인의 행위는 본인에게 직접 효력이 귀속된다.
복대리의 요건
임의대리에서의 복대리
임의대리에서 복대리가 가능하려면 본인의 허가가 있거나 부득이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민법 제120조).
본인의 허가는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할 수 있다. 부득이한 사유는 대리인이 병으로 행위할 수 없는 경우, 긴급한 상황 등을 말한다.
법정대리에서의 복대리
법정대리인은 자기의 책임으로 복대리인을 선임할 수 있다(민법 제121조). 임의대리와 달리 본인의 허가나 부득이한 사유가 필요하지 않다.
복대리의 효과
복대리인과 본인 사이에는 직접적인 대리관계가 성립한다. 복대리인의 행위는 본인에게 직접 효력이 귀속된다.
대리인과 복대리인 사이에도 일정한 관계가 성립한다. 대리인은 복대리인의 선임과 감독에 대해 책임을 진다.
대리인의 책임범위는 복대리 선임의 사유에 따라 다르다. 허가에 의한 복대리에서는 선임·감독상의 과실에 대해서만 책임지고, 부득이한 사유에 의한 복대리에서는 고의·중과실에 대해서만 책임진다.
결론
대리제도는 현대 거래사회의 복잡성과 효율성 요구에 부응하는 핵심적 법률제도로, 본인을 위한 대리인의 행위가 본인에게 직접 효력을 미치게 하는 법기술이다. 임의대리는 본인의 수권행위에 의해 발생하고, 법정대리는 법률의 직접 규정에 의해 발생하며, 각각 고유한 특성과 규율을 갖는다. 대리행위가 유효하려면 현명, 대리권의 존재, 적법한 의사표시가 필요하며, 의사표시의 하자는 원칙적으로 대리인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무권대리는 대리권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대리행위로, 본인의 추인이 있으면 소급적으로 유효하게 되고, 추인이 없으면 무권대리인이 상대방에 대해 책임을 진다. 표견대리는 대리권의 외관을 신뢰한 선의의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 거래안전을 확보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대리권은 다양한 사유로 소멸하며, 소멸 후의 행위는 무권대리가 되지만 표견대리로 보호받을 수 있다. 복대리는 대리인이 다시 대리인을 선임하는 제도로, 복잡한 거래관계에서 유용하게 활용된다. 대리제도에 대한 체계적 이해는 민법의 기본 구조를 파악하고 실무에서 활용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