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 9. 조건·기한·기간의 이론과 법률행위에 미치는 효과

법률행위는 의사표시만으로 즉시 확정적인 효력을 발생시키는 것이 원칙이지만, 당사자의 필요에 따라 그 효력의 발생이나 소멸을 미래의 사실에 의존하게 할 수 있다. 조건과 기한이 바로 그런 제도다. 또한 법률관계에서 일정한 기간의 경과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우도 많다. 조건, 기한, 기간은 각각 다른 법적 성질을 가지면서도 법률행위의 효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조건의 개념과 성질

조건의 정의와 요건

조건이란 법률행위의 효력의 발생 또는 소멸을 장래의 불확실한 사실에 의존하게 하는 법률행위의 부관을 말한다. 조건이 되려면 장래성, 불확실성, 부관성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장래성이란 조건이 되는 사실이 미래에 일어날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실이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실은 조건이 될 수 없다. 다만 당사자가 그 사실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조건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불확실성이란 그 사실이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드시 일어날 것이 확실한 사실이나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 확실한 사실은 조건이 될 수 없다. 이런 경우는 기한이나 무조건 행위가 된다.

부관성이란 조건이 법률행위에 부가된 종속적 요소라는 것이다. 조건은 주된 법률행위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고, 주된 법률행위의 효력에 영향을 미치는 부수적 요소다.

조건의 분류

조건은 여러 기준에 따라 분류된다.

정지조건과 해제조건

정지조건은 조건이 성취되면 법률행위의 효력이 발생하는 조건이다. “시험에 합격하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약속에서 시험 합격이 정지조건이다. 조건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법률행위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해제조건은 조건이 성취되면 법률행위의 효력이 소멸하는 조건이다. “졸업할 때까지 용돈을 주겠다”는 약속에서 졸업이 해제조건이다. 조건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법률행위의 효력이 계속된다.

수의조건과 불수의조건

수의조건은 당사자의 의사나 행위에 의해 성취 여부가 좌우되는 조건이다. “내가 원하면”이나 “네가 노력하면”과 같은 조건이 여기에 해당한다.

불수의조건은 당사자의 의사나 행위와 관계없이 성취 여부가 결정되는 조건이다. “비가 오면”이나 “주식이 오르면”과 같은 조건이 대표적이다.

적법조건과 위법조건

적법조건은 그 내용이 법률이나 선량한 풍속에 위반되지 않는 조건이다. 위법조건은 그 내용이 법률이나 공서양속에 위반되는 조건이다. 위법조건이 붙은 법률행위는 무효가 된다.

조건의 효과

조건성취 전의 법률관계

조건이 성취되기 전의 법률관계를 조건부 권리라고 한다. 조건부 권리는 완전한 권리는 아니지만 일정한 법적 보호를 받는다.

정지조건부 권리자는 조건이 성취될 가능성을 보호받는다. 상대방이나 제3자가 조건의 성취를 방해하거나 조건 성취 후의 이행을 불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이를 위반하면 손해배상책임을 진다.

조건부 권리는 일반적으로 처분할 수 있다. 조건부 채권의 양도, 조건부 물권의 처분 등이 가능하다. 다만 조건의 성취 여부에 따라 그 효력이 영향을 받는다.

상속이나 압류도 가능하다. 조건부 권리도 재산권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 상속의 대상이 되고, 강제집행의 객체가 될 수 있다.

조건성취의 효과

조건이 성취되면 조건에 따른 효력이 발생한다. 정지조건이 성취되면 법률행위의 효력이 발생하고, 해제조건이 성취되면 법률행위의 효력이 소멸한다.

조건성취의 효력은 원칙적으로 소급하지 않는다. 조건이 성취된 때부터 장래에 향하여 효력이 발생하거나 소멸한다. 이는 조건 성취 전에 생긴 제3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당사자가 소급효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경우에는 소급효를 인정할 수 있다. 또한 법률행위의 성질상 소급효가 당연히 예정된 경우도 있다.

조건의 불성취

조건이 성취되지 않으면 정지조건부 법률행위는 확정적으로 무효가 되고, 해제조건부 법률행위는 확정적으로 유효가 된다.

조건불성취가 확정되는 시점은 조건의 내용에 따라 다르다. 조건에 기한이 정해진 경우에는 그 기한이 지나면 불성취가 확정된다. 기한이 없는 경우에는 사회통념상 성취가 불가능하게 된 때 불성취가 확정된다.

기한의 개념과 종류

기한의 정의와 특징

기한이란 법률행위의 효력의 발생 또는 소멸을 장래의 확실한 사실에 의존하게 하는 법률행위의 부관을 말한다. 기한은 조건과 달리 성취가 확실한 미래의 사실이 특징이다.

기한이 되는 사실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 확실해야 한다. 다만 언제 일어날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의 사망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언제 일어날지는 확실하지 않으므로 기한이 될 수 있다.

기한은 조건과 달리 그 도래가 확실하므로, 기한 도래 전에도 일정한 효력을 갖는다. 이는 조건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기한의 분류

시기와 종기

시기는 기한이 도래하면 법률행위의 효력이 발생하는 기한이다. “3월 1일부터 임대하겠다”는 약정에서 3월 1일이 시기다.

종기는 기한이 도래하면 법률행위의 효력이 소멸하는 기한이다. “12월 31일까지 임대하겠다”는 약정에서 12월 31일이 종기다.

확정기한과 불확정기한

확정기한은 언제 도래할지가 확실한 기한이다. 특정한 연월일이나 일정한 기간의 경과 등이 확정기한이다.

불확정기한은 도래할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 도래할지는 불확실한 기한이다. 사람의 사망이나 건물의 완성 등이 불확정기한이다.

덧붙인 기한과 본래의 기한

덧붙인 기한은 당사자가 법률행위에 부가한 기한이다. 본래의 기한은 법률행위의 성질상 당연히 존재하는 기한이다.

기한의 효과

기한 도래 전의 효과

기한부 법률행위는 기한 도래 전에도 효력이 있다. 다만 이행을 청구할 수 없을 뿐이다. 이는 조건부 법률행위와 다른 점이다.

기한부 채무는 기한 도래 전에는 이행을 청구할 수 없다. 채무자가 기한 도래 전에 변제한 경우에는 부당이득으로 반환을 청구할 수 없다. 이는 기한의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본다.

기한부 권리는 양도, 상속, 압류가 가능하다. 기한부 채권도 양도할 수 있고, 기한부 채무도 인수할 수 있다.

기한의 이익과 그 상실

기한의 이익이란 기한 도래까지 이행을 유예받는 이익을 말한다. 기한의 이익은 원칙적으로 채무자를 위한 것이다.

기한의 이익은 포기할 수 있다. 채무자가 기한 도래 전에 변제하면 기한의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본다. 다만 상대방에게 불리한 경우에는 포기할 수 없다.

일정한 경우에는 기한의 이익을 상실한다(민법 제388조). 채무자가 파산한 때, 담보를 멸실·손상시키거나 감소시킨 때, 담보를 제공하지 않은 때 등에는 채권자가 즉시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

기한 도래의 효과

기한이 도래하면 시기의 경우 법률행위의 효력이 발생하고, 종기의 경우 법률행위의 효력이 소멸한다.

기한 도래의 효력은 소급하지 않는다. 기한이 도래한 때부터 장래에 향하여 효력이 발생하거나 소멸한다.

기한부 채권은 기한이 도래하면 즉시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 기한부 채무는 기한이 도래하면 즉시 이행해야 한다.

기간의 계산

기간의 의의

기간이란 시간의 계속을 말한다. 기간은 어떤 사실이 계속되는 시간적 폭을 나타낸다. 기간의 계산은 권리의 취득이나 소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기간은 기한과 구별된다. 기한은 특정한 시점을 말하고, 기간은 시간의 경과를 말한다. “3월 1일까지”는 기한이고, “3개월간”은 기간이다.

기간계산의 원칙

기간의 계산에 관해서는 민법에 일반원칙이 규정되어 있다(민법 제155조~제161조).

기간의 첫날은 산입하지 않는다(민법 제155조). 다만 그 첫날이 오후 12시에 시작한 때에는 그 날을 산입한다. 예를 들어 3월 5일에 시작하는 10일의 기간은 3월 15일에 만료된다.

기간을 시, 일, 주, 월 또는 년으로 정한 때에는 기간말일의 종료로써 기간이 만료된다(민법 제156조).

기간의 말일이 토요일이나 공휴일에 해당하는 때에는 기간은 그 익일에 만료된다(민법 제161조). 이는 관공서나 법원의 업무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월수나 연수로 정한 기간

기간을 월수로 정한 경우에는 역산법을 사용한다. 기간 만료일의 월에서 기간의 개월수만큼 역산하여 그에 해당하는 날이 기간의 첫날이 된다.

예를 들어 3월 31일을 기준으로 1개월 전은 2월 28일(평년) 또는 2월 29일(윤년)이 된다. 해당월에 대응일이 없는 경우에는 그 월의 말일로 본다.

연수로 정한 기간도 같은 방법으로 계산한다. 다만 윤년과 평년의 차이는 고려하지 않는다.

조건과 기한의 비교

공통점

조건과 기한은 모두 법률행위의 부관이다. 법률행위의 주된 내용에 부가되어 그 효력에 영향을 미친다.

둘 다 미래의 사실을 내용으로 한다. 과거나 현재의 사실은 조건이나 기한이 될 수 없다.

둘 다 법률행위의 효력의 발생이나 소멸에 영향을 미친다. 정지조건과 시기, 해제조건과 종기가 각각 대응된다.

차이점

가장 큰 차이는 확실성이다. 조건은 불확실한 사실이고, 기한은 확실한 사실이다.

효력 발생 시기에서도 차이가 있다. 조건부 법률행위는 조건 성취 전에는 효력이 없거나 불완전하지만, 기한부 법률행위는 기한 도래 전에도 효력이 있다.

처분가능성에서도 차이가 있다. 기한부 권리는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지만, 조건부 권리의 처분은 조건의 성취 여부에 영향을 받는다.

소급효에서도 차이가 있다. 기한의 효력은 소급하지 않지만, 조건의 효력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소급할 수 있다.

현대적 쟁점

복잡한 조건과 기한

현대 거래에서는 복잡한 조건이나 기한이 붙는 경우가 많다. 여러 조건이 중첩되거나, 조건과 기한이 결합되는 경우도 있다.

금융상품에서는 복잡한 조건부 거래가 일반적이다. 파생상품이나 구조화상품 등에서는 여러 변수에 의존하는 복잡한 조건이 설정된다.

이런 경우 조건의 성취 여부나 기한의 도래 시점을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 당사자의 의사와 거래의 실질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전자거래와 조건·기한

전자거래에서는 시스템에 의한 자동적 조건 판단이나 기한 관리가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기술적 오류나 시스템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전자계약에서 조건이나 기한의 설정과 확인은 당사자가 직접 하지 않고 시스템이 자동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시스템의 판단 기준과 오류 가능성이 문제된다.

국제전자거래에서는 시차 문제도 중요하다. 어느 나라의 시간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서머타임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등이 쟁점이 된다.

환경변화와 조건·기한

기후변화나 팬데믹과 같은 예상치 못한 환경변화는 조건이나 기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불가항력으로 인해 조건의 성취나 기한의 준수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이런 경우 조건이나 기한의 변경이나 면제가 문제된다. 계약의 근본적 변경사정이나 불가항력 조항의 적용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

또한 ESG 경영이나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조건들이 증가하고 있다. 환경성과나 사회적 책임과 연결된 조건부 거래가 확산되고 있다.

결론

조건, 기한, 기간은 법률행위의 효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로, 당사자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유연한 수단이다. 조건은 불확실한 미래 사실에 법률행위의 효력을 의존시켜 위험을 분배하고 유인을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기한은 확실한 미래 사실에 효력을 연결시켜 이행시기를 조절하고 당사자에게 준비시간을 제공한다. 기간은 시간의 경과 자체가 법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조건과 기한은 확실성 여부에서 근본적 차이를 보이며, 이로 인해 효력 발생 시기, 처분가능성, 소급효 등에서 서로 다른 취급을 받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금융상품의 복잡화, 전자거래의 확산, 환경변화의 가속화 등으로 인해 조건과 기한에 대한 새로운 쟁점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기간의 계산은 권리의 득실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로, 정확한 계산원칙의 적용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제도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복잡한 현대 거래관계를 설계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