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지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경제통합 모델이 주목받고 있다. 바로 태평양동맹(Pacific Alliance, PA)이다. 전통적인 대서양 중심의 남미공동시장(MERCOSUR)과는 다른 태평양 지향적 접근으로 중남미 경제지형을 바꾸고 있는 이 조직을 자세히 살펴보자.
태평양동맹의 탄생과 구성
태평양동맹은 2011년 4월 28일 멕시코, 칠레, 페루, 콜롬비아 4개국 정상이 페루 리마에서 체결한 ‘리마 선언’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2012년 6월 6일 칠레 안토파가스타에서 개최된 태평양 정상회의에서 4개국 정상이 ‘태평양동맹 기본협정’에 서명하면서 공식 출범했다.
이 4개 회원국은 각각 독특한 경제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멕시코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회원국이자 현재는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에 참여하는 북미 시장의 관문 역할을 한다.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경제개방을 실시한 국가로 현재까지 역내에서 경제개방도가 가장 높다. 페루와 콜롬비아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신흥경제국이다.
경제적 규모와 잠재력
태평양동맹의 경제적 규모는 상당하다. 4개 회원국의 총 GDP는 약 2조 400억 달러로 전 세계 GDP의 2.5%를 차지한다. 총 인구는 2억 2,500만 명이며, 일인당 평균 GDP는 1만 8,000달러에 달한다. 이는 중남미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권 중 하나임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 국가가 모두 태평양에 면해 있어 아시아태평양 경제권과의 연결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국가는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과 활발한 교역을 펼치고 있으며, 환태평양 경제 네트워크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개방형 지역주의의 특징
태평양동맹이 기존 중남미 경제통합체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개방형 지역주의 접근법이다. 전통적인 남미공동시장이 역내 중심의 폐쇄적 통합을 추구했다면, 태평양동맹은 처음부터 글로벌 경제와의 연결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회원국 간에는 이미 자유무역지대가 설정되어 있으며, 유가증권시장 통합을 통한 MILA(Mercado Integrado Latinoamericano) 구축, 역내 인구 이동 자유화 등이 실현되고 있다. 더 나아가 외부 국가들과의 협력에도 적극적이어서 현재 59개 국가가 참관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준회원국 제도와 한국의 참여
2017년 태평양동맹은 준회원국 제도를 창설했다. 이는 회원국이 아닌 국가들도 태평양동맹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여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현재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싱가포르가 준회원국 가입을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며, 싱가포르는 2021년 태평양동맹-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PASFTA)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한국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2018년 7월 한국의 준회원국 가입 후보국 지위가 선언된 이후, 정부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협상 개시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2019년 7월 페루 리마에서 개최된 제14차 태평양동맹 정상회의에서 한국의 준회원국 가입 협상을 9월 중 개시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에게 주는 기회
한국의 태평양동맹 준회원국 가입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크다. 첫째, 중남미 시장으로의 수출 다변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10대 수출국 중 하나지만 아직 FTA가 체결되지 않은 멕시코 시장에서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낮춰 우리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둘째, 상호보완적 무역구조를 활용할 수 있다. 한국은 자동차 및 부품, 철강, 전자기기 등 공산품을 주로 수출하고, 광물성연료, 구리, 식용과일 같은 원자재 및 농산물을 수입하는 구조로 태평양동맹 국가들과 무역 보완성이 높다.
셋째,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 확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태평양동맹 국가들은 아시아태평양 경제권과 북미, 남미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
해역네트워크의 새로운 가능성
태평양동맹은 단순한 경제통합을 넘어 해역네트워크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기존의 육지 중심 지역주의와 달리 태평양이라는 바다를 중심으로 한 경제공동체 형성은 21세기 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에게 이러한 해역네트워크 개념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태평양을 매개로 한 경제협력은 한국이 동아시아를 넘어 환태평양 경제권의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향후 전망과 과제
태평양동맹의 미래는 밝지만 몇 가지 과제도 있다. 최근 페루에서 좌파 정권이 집권하고, 칠레와 콜롬비아에서도 정치적 변화가 예상되면서 태평양동맹의 확대 전망에 불확실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멕시코 사례에서 보듯이 좌파 정권 집권이 곧바로 경제개방 정책의 후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태평양동맹 같은 개방형 지역주의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자원안보, 해양문제, 정보통신기술, 문화교류, 지식공유, 인재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기회가 확대될 전망이다.
마무리
태평양동맹은 21세기 경제통합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개방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접근법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앞으로 한국이 태평양동맹과 어떤 형태의 파트너십을 구축해 나갈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중남미 시장 진출을 꿈꾸는 한국 기업들에게 태평양동맹은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연결된 이 새로운 경제권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