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스톤의 역대급 베팅: 유럽에 5,000억 달러 투자하는 이유와 리스크

세계 최대 사모펀드 블랙스톤(Blackstone)이 향후 10년간 유럽에 5,000억 달러(약 700조원)를 투자하겠다는 파격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스티브 슈바르츠만(Steve Schwarzman) CEO는 이를 “주요 기회”라고 표현하며, 지정학적 변화 속에서 유럽의 성장 전망이 개선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블랙스톤의 야심찬 유럽 진출 전략

25년 만에 내놓은 최대 규모 투자

블랙스톤 런던 사무소 25주년을 맞아 발표된 이번 계획은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다. 1조 달러 이상의 자산을 관리하는 세계 최대 대체투자회사가 유럽 대륙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현재 블랙스톤은 이미 영국에만 약 1,000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런던 사무소에 650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는 영국 내 최대 외국인 투자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한다.

지정학적 변화가 만든 기회

슈바르츠만 CEO는 “유럽이 여기서 접근 방식을 바꾸기 시작하고 있으며, 이것이 더 높은 성장률로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글로벌 동맹 재편과 무역 정책 변화로 유럽이 새로운 경제 성장 경로를 모색하는 상황이 블랙스톤에게는 투자 기회가 되고 있다.

투자 분야별 세부 전략

방위산업: 역사적 기회의 등장

유럽연합은 2014년 GDP 대비 1.1%였던 국방예산을 2024년 1.5%로 늘렸으며, NATO 회원국들은 집단적으로 2% 목표를 달성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EU의 ‘2030 준비계획(Readiness 2030)’ 이니셔티브가 이러한 변화를 이끌고 있다.

특히 독일은 3월에 역사적 규모의 국방 지출 계획을 승인했다. 2020년 이후 미국과 캐나다가 항공우주·국방 분야 사모펀드 및 벤처캐피털 투자의 83%를 차지했던 상황에서, 이제 유럽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프라와 데이터센터: AI 혁명의 기반

블랙스톤은 “데이터센터부터 이를 구동하는 에너지까지, AI 혁명을 뒷받침할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유럽의 디지털 전환과 AI 도입 가속화는 데이터센터, 통신 인프라, 재생에너지 그리드에 대한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현재 블랙스톤은 북미 최대 해상 터미널 운영업체 Carrix, 유럽과 아메리카 전역에서 28,000개 이상의 셀타워를 운영하는 Phoenix Tower International(PTI) 등에 투자하고 있다.

공급망 재편: 니어쇼링의 수혜자

트럼프 관세 정책 여파로 기업들이 공급망 최적화와 미국 노출 감소를 추진하면서, 동유럽, 북아프리카, 서발칸 지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추세가 가속화되고 있다. 독일에 430억 유로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인텔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블랙스톤의 유럽 부동산 파트너스 VII 펀드가 106억 달러를 조달하여 저평가된 자산에 집중하는 것도 이러한 트렌드를 반영한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만은 아니다

유럽 시장의 구조적 한계

블랙스톤이 유럽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사모크레딧 펀드 판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6개월 만에 2억 4천만 유로만 모집한 반면, 미국의 동등한 펀드(BCRED)는 같은 기간 120억 달러를 조달했다.

이는 유럽 시장의 파편화된 규제 체계와 복잡성을 보여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주요 성장 시장인 반면 영국은 상대적으로 더딘 성장을 보이고 있다.

부동산 시장의 유동성 위기

블랙스톤의 주력 부동산 펀드 BREIT는 2024년 2월까지 1년 넘게 투자자 환매를 제한했다. 글로벌 상업용 부동산 침체로 투자자들이 대거 자금을 빼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블랙스톤의 ‘준유동성’ 펀드 모델에 내재된 위험을 보여준다. 투자자들은 보통 1-2년의 ‘소프트 락’ 기간 후 월간 또는 분기별로 자금을 인출할 수 있지만, 펀드 차원의 제한이 있다.

기업지배구조 논란

컬럼비아대학교 존 코피(John Coffee) 교수는 블랙스톤의 기업지배구조를 “병리적”이라고 비판하며, 투자회사법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상장 시 법인이 아닌 유한책임조합 형태를 취하면서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의 일반적인 기업지배구조 기준을 회피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규제 환경의 복잡성

2026년 발효 예정인 EU의 AIFMD II 지침은 더 엄격한 위임 규칙과 유동성 관리 요구사항을 부과한다. 이는 컴플라이언스 비용을 증가시키지만, 동시에 사모펀드 시장의 안정성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한국 투자자들에게 주는 시사점

대체투자 시장의 확산

블랙스톤의 유럽 진출 확대는 글로벌 대체투자 시장이 기관투자자뿐만 아니라 개인투자자로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사모펀드, 리츠(REITs), 인프라 펀드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의 투자 기회화

미중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오히려 새로운 투자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 공급망 재편, 방위산업 성장, 에너지 전환 등이 대표적 투자 테마로 부상하고 있다.

ESG와 지속가능성의 중요성

블랙스톤도 EU의 지속가능금융공시규정(SFDR)에 따라 지속가능성 리스크를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 통합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ESG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론: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는 거대한 베팅

블랙스톤의 5,000억 달러 유럽 투자 계획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향후 10년간 글로벌 투자 지형의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유럽의 국방 지출 증가, 디지털 전환 가속화, 공급망 재편 등은 분명 매력적인 투자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시장 파편화, 규제 복잡성, 유동성 위험 등의 도전 과제도 만만치 않다.

슈바르츠만 CEO의 “유럽이 접근 방식을 바꾸고 있다”는 진단이 맞다면, 이번 투자는 블랙스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베팅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유럽의 구조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5,000억 달러라는 거대한 자금이 기대만큼의 수익을 내지 못할 위험도 있다.

결국 이번 투자 계획의 성공 여부는 유럽이 정말로 “높은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