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 팀장이 된 이유를 정말 모르겠어요. 실력은 우리 팀에서 중간 정도인데…”
연말 인사발표가 나고 나면 사무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볼멘소리다. 객관적인 성과지표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승진과 보상이 이루어지고, 정작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허탈감에 빠진다.
이런 현상의 뒤에는 ‘조직 정치(Organizational Politics)’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 아무리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도, 인간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정치적 역학관계가 형성된다. 문제는 이런 조직 정치가 성과평가의 공정성에 대한 직원들의 인식을 어떻게 왜곡시키느냐는 것이다.
조직 정치란 정확히 무엇인가
조직 정치는 공식적인 권한 구조 밖에서 일어나는 영향력 행사 과정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규정에 없지만 실제로는 작동하는 힘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건전한 조직 정치는 경직된 조직 구조를 보완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정치적 활동이 성과평가 과정에 개입할 때 발생한다.
조직 정치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개인적 로비’로, 상급자와의 개인적 관계를 통해 유리한 평가를 받으려는 시도다. 둘째는 ‘파벌 형성’으로,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끼리 연합해서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셋째는 ‘정보 조작’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는 부각시키고 불리한 정보는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행위다.
성과평가가 정치의 도구가 되는 순간들
상급자와의 친밀도가 점수를 좌우할 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은 상급자와의 개인적 친밀도가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다. 같은 학교 출신이거나, 취미가 비슷하거나, 술자리에서 자주 마주치는 직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A부서의 김과장과 이과장은 비슷한 성과를 올렸지만, 김과장은 부장과 같은 골프장을 다니고 이과장은 골프를 치지 않는다. 연말 평가에서 김과장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을 때, 이과장은 물론이고 다른 팀원들도 “골프 치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직원들은 업무 성과보다는 상급자와의 관계 관리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정작 중요한 업무는 뒷전이 되고, 조직 전체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보이는 성과 vs 진짜 성과의 괴리
조직 정치에 능숙한 사람들은 ‘보이는 성과’를 만드는 데 탁월하다. 실제로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타인의 공로를 가로채는 기술이 뛰어나다.
한 IT기업의 사례를 보자. 대형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을 때, 실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개발팀의 박대리였다. 하지만 프로젝트 매니저였던 최차장이 성과 발표에서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주도한 것처럼 설명했다.
박대리는 기술적 전문성은 뛰어나지만 프레젠테이션이나 정치적 감각은 부족했다. 반면 최차장은 기술적 기여는 적었지만 경영진과의 소통이나 성과 포장에는 능숙했다. 결과적으로 승진과 포상은 최차장이 가져갔고, 박대리는 “열심히 일해봐야 소용없다”는 좌절감에 빠졌다.
파벌 간 갈등이 평가를 왜곡할 때
규모가 큰 조직에서는 자연스럽게 파벌이 형성된다. 같은 출신 학교, 같은 부서 경험, 같은 상급자 밑에서 일한 경험 등으로 끈끈한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런 파벌 간의 경쟁이 성과평가에 영향을 미칠 때다.
한 대기업의 마케팅본부에서는 오랫동안 ‘A대 출신 그룹’과 ‘B대 출신 그룹’ 간의 미묘한 경쟁이 있었다. 각 그룹의 리더들이 임원급으로 올라가면서 이런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연말 평가 시즌이 되면 각 파벌의 리더들은 자신의 그룹 구성원들에게 유리한 평가를 내리려고 노력했다. 반대 파벌 구성원들의 성과는 폄하하거나 문제점을 부각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중간에 낀 직원들은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실력보다는 정치적 선택이 더 중요해 보이는 순간이다.
공정성 인식이 무너지는 메커니즘
절차적 공정성의 환상
많은 기업들이 “우리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자신한다. 360도 평가, KPI 기반 정량평가, 다면평가 등 정교한 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이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평가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는 항상 존재하고, 조직 정치는 바로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예를 들어 KPI 달성률이 95%인 직원과 90%인 직원이 있다고 하자. 객관적으로는 전자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평가자가 후자와 더 친밀한 관계라면 “90% 달성도 충분히 우수하고, 추가적인 기여도를 고려하면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낸다.
분배적 공정성의 왜곡
분배적 공정성은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조직 정치가 개입하면 이 원칙이 심각하게 왜곡된다. 실제 기여도와 받는 보상 사이의 괴리가 커질수록 직원들의 불공정성 인식은 강해진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불공정성이 가시화될 때다. 승진 발표나 포상 시상식에서 “저 사람이 왜?”라는 의문이 공공연히 제기되면, 조직 전체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다.
한 제조업체에서는 영업성과가 상위 5% 안에 드는 직원이 승진에서 탈락하고, 중간 정도 성과를 낸 직원이 승진한 사건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승진한 직원이 인사담당 임원의 조카였다. 이 사건 이후 해당 회사의 이직률이 급증했다.
상호작용적 공정성의 붕괴
상호작용적 공정성은 평가 과정에서 얼마나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는지와 관련이 있다. 평가 결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듣고, 이의제기 기회를 갖고, 평가자로부터 인격적 존중을 받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조직 정치가 만연한 환경에서는 이런 상호작용적 공정성이 크게 훼손된다. 평가자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결정에 대해 진실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 “위에서 시켜서”, “전체적인 균형을 고려해서” 같은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한다.
직원들은 이런 답변에서 진정성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나를 바보로 아는구나”라는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조직 정치가 개인과 조직에 미치는 영향
개인 차원의 파괴적 효과
조직 정치로 인한 불공정한 성과평가는 개인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가장 직접적인 것은 동기 저하다. “열심히 해봐야 소용없다”는 학습된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행동 양식의 변화다. 업무 성과보다는 정치적 기술을 키우는 데 집중하게 된다. 상급자와의 관계 관리, 파벌 내에서의 위치 확보, 다른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법 등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한 직장인은 이렇게 토로했다. “입사 초기에는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많이 냈죠. 하지만 몇 년 지나보니 승진하는 사람들은 다 상사와 가까운 사람들이더라고요. 이제는 업무보다는 관계 관리에 더 신경 쓰고 있어요. 솔직히 씁쓸해요.”
조직 차원의 악순환
조직 전체로 봤을 때는 더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인재 유출이다. 실력 있고 성실한 직원들이 조직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정치적 기술은 뛰어나지만 업무 능력은 떨어지는 사람들이 주요 보직을 차지하게 된다.
조직문화도 점차 왜곡된다. 성과보다는 관계가, 혁신보다는 현상유지가, 도전보다는 안전이 중시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장기적으로는 조직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한 중견기업의 인사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몇 년간 우수한 신입사원들의 조기 이직률이 급증했어요. 면담해보면 대부분 ‘공정하지 않은 평가와 승진 시스템’ 때문이라고 답해요. 정작 회사에 남는 건 적당히 눈치 보면서 안전하게 일하는 사람들뿐이에요.”
공정성 인식을 회복하는 방법들
투명성의 대폭 강화
조직 정치가 개입할 여지를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다. 평가 기준, 평가 과정, 평가 결과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공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승진 기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각 기준별 가중치도 공개한다. 평가위원회의 구성과 논의 과정도 어느 정도 투명하게 공개한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나 조직 화합 차원에서 제한은 있지만,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좋다.
한 외국계 기업에서는 모든 승진 과정을 온라인 시스템으로 관리한다. 지원 자격, 평가 기준, 심사 일정, 결과 발표까지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된다. 탈락한 지원자들도 구체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서 불공정성 논란이 크게 줄었다.
평가자의 다원화
한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지 말고, 여러 관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직속 상관뿐만 아니라 동료, 후배, 고객, 협력업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평가자들 간의 견제와 균형이다. 한 명의 평가자가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권한을 분산시켜야 한다.
어떤 기업에서는 ‘평가자의 평가’ 시스템을 도입했다. 평가를 받은 직원들이 평가자의 공정성과 전문성을 역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평가자들도 더 신중하고 공정하게 평가하게 된다.
데이터 기반 평가의 확대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를 줄이기 위해 객관적 데이터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 단순히 매출이나 실적 같은 정량적 지표뿐만 아니라, 고객 만족도, 동료 평가, 프로젝트 성과 등도 데이터화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데이터들이 조작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외부 감사나 교차 검증 같은 장치를 마련해서 데이터의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의제기 및 구제 절차의 실질화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이라도 오류나 불공정한 사례는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구제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절차가 있느냐는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이의제기 절차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이의를 제기했다가 오히려 불이익을 당할까 봐 직원들이 꺼리는 분위기도 있다.
진정한 구제 절차가 되려면 독립성과 실효성을 보장해야 한다. 평가 과정에 관여하지 않은 제3자가 심사하고, 문제가 확인되면 실질적인 구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정치 없는 조직은 환상일까
그렇다면 조직 정치를 완전히 없앨 수 있을까? 아쉽게도 답은 “불가능하다”다. 인간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정치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조직 정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건전한 조직 정치는 다양한 의견을 조정하고,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연합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조직 전체의 이익을 해치는 파괴적 정치다.
핵심은 게임의 룰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어떤 행위는 허용되고 어떤 행위는 금지되는지, 위반 시에는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룰이 일관되게 적용되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공정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과평가의 공정성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완벽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지만, 더 나은 시스템을 향해 계속 개선해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조직의 리더들이 공정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직원들은 리더의 말보다는 행동을 더 주의 깊게 관찰한다. 리더가 정치적 계산보다는 원칙과 공정성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일 때, 조직 전체의 문화도 그 방향으로 변화한다.
결국 조직 정치와 성과평가 공정성의 문제는 기술적인 해결책만으로는 부족하다. 조직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의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할 때만 진정한 공정성을 실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