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10. 정치적 권리와 청구권적 기본권 – 선거권, 공무담임권, 청원권, 재판청구권과 절차적 보장

정치적 권리와 청구권적 기본권은 민주주의의 실질적 작동과 기본권 보장의 절차적 측면을 담당하는 핵심적 권리들이다. 정치적 권리는 국민이 국정에 참여하고 정치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며, 청구권적 기본권은 다른 기본권이 침해받았을 때 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절차적 장치를 마련한다. 이들은 실체적 기본권들이 공허한 선언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실효성을 갖도록 하는 보장적 기본권이라 할 수 있다.

선거권과 민주적 정당성

선거권은 헌법 제24조가 보장하는 권리로서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 선거권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국민주권 원리를 실현하는 핵심 수단이다.

선거권의 성격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주관적 공권으로서, 각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투표할 수 있는 개인적 권리다.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 제도로서, 민주적 정당성을 창출하고 정치권력을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다. 개별 유권자의 의사가 모여서 국민 전체의 의사를 형성하고, 이것이 정치권력의 정당성 근거가 된다.

선거권의 주체는 원칙적으로 국민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다 선거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연령, 거주 등 일정한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만 18세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을 인정한다. 과거 만 20세에서 만 19세, 다시 만 18세로 낮아진 것은 정치참여 연령을 확대하려는 추세를 반영한다.

외국인의 선거권은 제한적으로만 인정된다. 영주권을 취득한 외국인에게는 지방선거 참여권이 부여되지만, 국정선거는 국민에게만 한정된다. 이는 국민주권 원리와 민주적 정당성의 관점에서 당연한 결과다. 다만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면서 장기 거주 외국인의 정치참여 방안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선거권 행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투표 의무제를 채택한 일부 국가와 달리, 우리나라는 투표를 권리로 보므로 투표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된다. 또한 투표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고, 매수나 협박 등 부정한 방법으로 투표에 영향을 주는 것은 금지된다.

선거제도의 민주성도 중요하다. 선거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려면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평등선거의 원칙에 따라 모든 유권자의 투표 가치가 동등해야 하고, 직접선거를 통해 유권자가 직접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 비밀선거로 투표의 자유를 보장하고, 자유선거를 통해 후보자와 정당 간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거구 획정의 문제는 특히 중요하다. 선거구 간 인구 편차가 크면 투표 가치의 불평등이 발생한다. 헌법재판소는 국회의원 선거구 간 인구 편차가 2:1을 넘으면 위헌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하지만 단순한 인구 비례만이 아니라 지역 대표성, 행정구역의 완결성 등도 고려해야 하므로 완전한 평등은 어렵다.

공무담임권과 공직 접근의 평등

공무담임권은 헌법 제25조가 보장하는 권리로서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담임권을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국민이 능력과 자격에 따라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공무담임권의 의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실현에 있다. 공직이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전유물이 되면 민주주의가 왜곡된다. 모든 국민에게 공직 접근 기회가 열려있어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직에 진출하고, 이를 통해 민주적 대표성이 확보된다.

공무담임권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공직 취임의 기회균등이 핵심이다. 출신, 성별, 종교,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공직 진출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오직 능력과 자격만이 공직 선발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공무원의 신분보장도 중요하다.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고 전문성을 발휘하려면 신분상의 안정이 필요하다. 공정한 인사관리를 통해 승진이나 전보에서도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공무원 임용에서의 평등원칙이 특히 중요하다. 공개경쟁의 원칙에 따라 모든 응시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다만 국가유공자나 장애인 등에 대한 우대는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 평등조치로서 허용된다. 하지만 그 정도와 범위는 합리적이어야 한다.

정치적 중립의무는 공무담임권의 중요한 제약이다.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하므로 정당 가입이나 선거운동 등이 제한된다. 이는 공무원의 정치적 권리를 제약하는 측면이 있지만, 행정의 계속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필요한 제한이다.

고위공직자의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 장관이나 차관 같은 정치적 임명직은 정권의 정책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므로 일반 공무원과는 다른 취급을 받는다. 정치적 책임을 지는 대신 신분보장의 정도는 낮다.

지방공무원의 경우에는 지방자치의 특성이 반영되어야 한다. 지역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지역 인재 우대나 지역 추천제 같은 특별한 고려가 가능하다.

청원권과 국민의 의사표현

청원권은 헌법 제26조가 보장하는 권리로서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 청원권은 국민이 국가기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이나 희망을 표시하고 그에 대한 심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청원권의 헌법적 의의는 민주주의 보완 기능에 있다. 선거를 통한 대의제만으로는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 청원제도는 선거 주기와 관계없이 언제든지 국민이 정부에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또한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청원권의 주체는 모든 국민이다. 심지어 외국인도 청원할 수 있다. 나이 제한도 없으므로 미성년자도 청원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도 청원 주체가 될 수 있다.

청원의 대상은 모든 국가기관이다. 국회, 정부, 법원은 물론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등 헌법기관도 포함된다. 지방자치단체도 청원의 대상이 된다. 청원 사항에는 특별한 제한이 없으므로 입법, 행정, 사법 등 모든 국정 분야에 대해 청원할 수 있다.

청원의 방식은 문서로 해야 한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이는 청원 내용을 명확히 하고 후속 처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다. 최근에는 온라인 청원제도가 활성화되면서 인터넷을 통한 청원도 늘어나고 있다.

청원에 대한 국가기관의 의무는 심사의무에 한정된다. 국가기관은 청원을 접수하고 심사해야 하지만, 청원 내용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심사 결과를 통지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민청원제도는 청원권의 현대적 발전 형태다. 청와대 국민청원이나 국회 국민동의청원 등이 대표적이다. 일정 수 이상의 동의를 받은 청원에 대해서는 정부나 국회가 공식 답변을 하도록 함으로써 청원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고 있다.

재판청구권과 사법접근권

재판청구권은 헌법 제27조가 보장하는 권리로서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국민이 자신의 권리나 의무에 관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 법원에 재판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재판청구권의 본질은 사법권에 대한 접근권이다. 아무리 좋은 실체적 권리가 있어도 그것이 침해되었을 때 구제받을 수 없다면 무의미하다. 재판청구권은 다른 모든 기본권을 실효적으로 보장하는 핵심적 수단이다. 또한 법치주의의 핵심 요소로서,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사법적으로 통제하는 기능도 한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재판청구권의 핵심 내용이다.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행정기관이나 다른 기관이 아닌 독립된 법관이 재판해야 한다는 의미다. 법률에 의한 재판은 법률에 근거한 절차에 따라 재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중요하다. 정의가 지연되면 정의가 거부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재판받을 권리의 보장을 위해서는 여러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전문적이고 복잡한 법적 절차에서 개인이 혼자 대응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한 것이다. 특히 형사사건에서는 국선변호인제도를 통해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피고인도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증거개시청구권반대심문권 등도 공정한 재판을 위해 중요하다. 당사자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하고, 상대방의 증인이나 증거에 대해 반박할 기회도 보장되어야 한다.

재판의 공개는 재판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공개재판을 통해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다만 성폭력 사건처럼 피해자 보호가 필요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비공개 재판이 허용된다.

상급심 재판을 받을 권리도 재판청구권에 포함된다. 1심 재판에서 불복이 있을 때 상급법원에 재심사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3심제를 채택해서 지방법원-고등법원-대법원의 단계적 심사를 통해 재판의 정확성을 높이고 있다.

국가배상청구권과 형사보상청구권

국가배상청구권과 형사보상청구권은 헌법 제29조가 보장하는 권리로서, 국가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인한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권리다.

국가배상청구권은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국가무책임주의를 버리고 국가도 불법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현대적 원칙을 확립한 것이다.

국가배상청구권의 성립 요건은 여러 가지다. 공무원의 직무상 행위여야 하고, 그 행위가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위법성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그로 인해 손해가 발생해야 하고, 직무상 행위와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형사보상청구권은 “형사피의자 또는 형사피고인으로서 구금되었던 자가 법률이 정하는 불기소처분을 받거나 무죄판결을 받은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에 정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무죄인데도 구금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 대한 국가의 보상 의무를 정한 것이다.

형사보상은 국가배상과는 성격이 다르다. 국가배상은 위법한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이지만, 형사보상은 적법한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상이다. 따라서 국가의 고의나 과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고, 단순히 구금 사실과 무죄 확정만으로 보상청구가 가능하다.

보상의 범위는 재산상 손해뿐만 아니라 정신적 손해도 포함한다. 구금으로 인한 소득 상실, 사회적 신용 실추, 정신적 고통 등이 모두 보상 대상이 된다. 보상액은 구금 기간, 구금 당시의 처우, 사회적 지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결정한다.

청구권적 기본권의 실효성 확보

청구권적 기본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려면 여러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사법접근성의 개선이 우선 과제다.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법정수수료 감면제도, 소송구조제도, 법률구조제도 등을 확충해야 한다. 최근에는 국선변호인제도가 형사사건뿐만 아니라 민사사건에도 확대되는 추세다.

절차의 간소화도 중요하다.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절차는 그 자체로 재판청구권 행사의 장벽이 된다. 소액사건 심판제도, 조정제도, 중재제도 등을 통해 간이하고 신속한 분쟁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권리구제기관의 다양화도 필요하다. 법원만이 아니라 행정심판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 등 다양한 준사법기관을 통해서도 권리구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전문성과 신속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사법부의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다.

피해자 중심의 절차 개선도 중요하다. 특히 성폭력이나 아동학대 같은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재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증인신문 시 비디오 링크 활용, 신뢰관계인 동석, 증거보전제도 등이 그 예다.

결론

정치적 권리와 청구권적 기본권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핵심 권리들이다. 선거권과 공무담임권은 국민이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며, 청원권과 재판청구권은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절차적 장치를 마련한다.

이러한 권리들은 다른 기본권들의 보장과 실현을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아무리 훌륭한 실체적 권리가 헌법에 선언되어 있어도, 그것을 실현하고 보호할 수 있는 절차적 권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선언에 그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권리들의 실현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전자투표, 온라인 청원, 화상재판 등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디지털 격차나 사이버 보안 같은 새로운 과제도 제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권리들이 형식적 보장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정치과정에 참여하고 권리구제를 받을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민주법치국가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 개선과 함께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