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중국 관계 ‘디리스킹’ 전략의 경제·기술 분화: 반보조금 조사부터 희토류 공급망까지, 한-EU 협력 전선의 새로운 기회

2023년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공식적으로 언급한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은 EU-중국 관계의 근본적 전환점을 의미한다. 완전한 탈결합(Decoupling)이 아닌 위험 감소를 통한 선택적 분리를 추구한다는 이 전략은, 40년간 지속된 EU의 대중 관여 정책에서 벗어나 경제 안보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특히 반보조금 조사 강화, 희토류와 배터리 공급망 다변화, 첨단기술 분야 투자심사 확대 등을 통해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는 한국에게 새로운 협력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디리스킹 전략의 탄생 배경과 진화

EU의 대중 디리스킹 정책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모델에 대한 우려, 2018년 트럼프 행정부의 미중 무역전쟁,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드러난 공급망 취약성,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준 에너지 의존의 위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특히 2021년 중국이 리투아니아에 가한 경제 보복은 EU로 하여금 경제적 상호의존이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디리스킹의 핵심은 ‘선택적 분리’다. 미국식 전면적 탈결합과 달리, EU는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으면서도 핵심 분야에서의 의존도를 줄이려 한다. EU는 이를 위해 세 가지 차원의 접근을 시도한다. 첫째는 ‘공급망 다변화’를 통한 중국 의존도 감소, 둘째는 ‘전략적 자율성’ 강화를 위한 역내 생산 능력 확충, 셋째는 ‘가치 동맹국’과의 협력 확대를 통한 대안 네트워크 구축이다.

흥미로운 점은 EU가 디리스킹을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지정학적 전략’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3년 6월 발표된 ‘EU 경제안보전략’에서 EU는 “경제적 상호의존이 정치적 영향력 확대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경제와 안보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탈냉전 이후 EU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서 현실주의적 접근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반보조금 조사의 확산: 전기차에서 태양광까지

EU의 디리스킹 전략에서 가장 가시적인 부분은 중국 기업에 대한 반보조금 조사 강화다. 2023년 10월 시작된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반보조금 조사는 그 신호탄이었다. EU는 BYD, 지리자동차, SAIC 등 중국 전기차 제조사들이 정부 보조금을 통해 불공정한 경쟁우위를 누리고 있다며 최대 38.1%의 잠정 관세를 부과했다. 이는 EU가 중국에 대해 취한 가장 강력한 통상 조치 중 하나다.

전기차 조사의 파급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중국 전기차의 EU 시장 점유율은 2023년 8%에서 2024년 상반기 6%로 감소했고,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은 숨통이 트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중국 측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중국 정부는 EU산 돼지고기와 브랜디에 대한 반덤핑 조사로 맞대응했고, 양측 간 통상 갈등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기차에 이어 태양광 패널도 조사 대상에 올랐다. 중국이 전 세계 태양광 패널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EU는 이러한 독점적 지위가 정부 보조금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신장 지역의 강제노동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EU는 인권과 공정경쟁을 연계한 새로운 형태의 통상 압박을 시도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EU가 개별 기업뿐만 아니라 중국의 ‘시스템’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이다. 2024년 발표된 ‘외국 보조금 규정(Foreign Subsidies Regulation, FSR)’은 중국의 국유기업이나 정부 지원을 받은 기업의 EU 내 인수합병이나 공공조달 참여를 제한한다. 이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모델과 EU의 시장경제 원칙 간의 근본적 충돌을 보여준다.

희토류와 배터리 공급망: 중국 의존도 탈피의 핵심

EU의 디리스킹 전략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희토류와 배터리 소재 공급망의 다변화다. 현재 EU는 희토류의 98%를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리튬이온 배터리 셀의 77%도 중국산이다. 이러한 극도의 의존은 중국이 언제든 ‘희토류 무기화’를 통해 EU에 압박을 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2010년 센카쿠 열도 분쟁 당시 중국이 일본에 대해 희토류 수출을 중단한 사례가 있어, EU의 우려는 현실적 근거를 갖는다.

EU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s Act)’을 제정했다. 이 법은 2030년까지 희토류 등 핵심 원자재의 역내 생산 비중을 10% 이상으로 늘리고, 특정 국가 의존도를 65% 이하로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EU는 아프리카, 남미, 호주 등과의 ‘원자재 파트너십’을 확대해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있다.

배터리 분야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EU는 2027년부터 배터리 여권제를 도입해 배터리의 원산지, 탄소발자국, 재활용 비율 등을 의무적으로 표기하도록 했다. 이는 중국산 배터리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동시에 폴란드, 헝가리, 스웨덴 등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 건설을 지원해 역내 생산 능력을 확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EU가 ‘순환경제’ 개념을 디리스킹과 연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폐배터리에서 리튬, 코발트, 니켈 등을 회수하는 재활용 기술을 발전시켜 원자재 수입 의존도를 줄이려는 것이다. 벨기에의 유미코어, 핀란드의 포튬 등 유럽 기업들이 이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어, 중국 의존도 감소와 동시에 유럽 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일석이조 효과를 노리고 있다.

첨단기술 분야: 투자심사와 기술 이전 제한

EU의 디리스킹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반도체, 5G/6G 통신 등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기술에서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유지하거나 확대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EU는 2019년 도입한 ‘외국인직접투자 심사제도’를 대폭 강화했다. 현재 EU 27개 회원국 중 25개국이 자체 투자심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 자본의 유럽 기업 인수에 대한 심사가 까다로워지고 있다.

특히 반도체 분야에서는 미국과 보조를 맞춘 대중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2023년 발표된 ‘유럽칩스법(European Chips Act)’은 430억 유로를 투입해 유럽의 반도체 생산 능력을 2030년까지 세계 점유율 2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동시에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의 중국 수출을 제한하는 조치도 도입했다. 네덜란드의 ASML이 중국에 대한 EUV 노광장비 수출을 중단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AI 분야에서는 2024년 시행된 ‘AI법(AI Act)’을 통해 중국 기술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안면인식, 감정인식, 사회신용 시스템 등 권위주의적 통제에 활용될 수 있는 AI 기술의 개발과 배포를 엄격히 제한했다. 이는 중국의 AI 감시 기술이 유럽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양자컴퓨팅 분야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EU는 ‘양자기술 플래그십’ 프로그램에 10억 유로를 투입해 유럽 고유의 양자컴퓨팅 생태계를 구축하려 한다. 동시에 양자컴퓨팅 관련 기술의 중국 이전을 막기 위한 수출통제 조치도 강화하고 있다. 독일이 중국 기업의 양자컴퓨팅 연구소 설립을 불허한 것이 그 예다.

회원국별 차별화된 접근: 독일의 딜레마와 동유럽의 강경론

EU의 디리스킹 정책에 대한 회원국들의 입장은 각기 다르다. 독일은 가장 복잡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독일 경제는 중국과의 관계에 깊이 얽혀 있어, 급격한 디커플링은 독일 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다. 폭스바겐의 중국 매출이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BASF는 중국에 100억 유로 규모의 화학단지를 건설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점진적 디리스킹’을 선호한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2023년 독일 정부는 중국 해운업체 코스코의 함부르크 항만 터미널 지분 인수를 부분적으로 허용했지만, 당초 계획된 35%에서 24.9%로 축소했다. 또한 화웨이와 ZTE 장비의 5G 네트워크 사용을 2029년까지 완전히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경제적 실용주의와 안보적 우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는 독일의 고민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강경한 입장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며 중국에 대한 의존도 감소를 주장해왔다. 프랑스는 중국 기업의 유럽 인수를 막기 위한 투자심사 강화를 주도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등 대안 시장 개척에도 적극적이다. 특히 원자력과 항공우주 분야에서 중국과의 기술 협력을 제한하는 조치를 먼저 도입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가장 강경한 대중 정책을 펼치고 있다. 폴란드는 화웨이 5G 장비 사용을 전면 금지했고, 체코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서 공식 탈퇴를 선언했다. 리투아니아는 대만과의 관계 강화로 중국의 경제 보복을 받았지만, 오히려 반중 정서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들 국가는 과거 소련의 지배를 경험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권위주의적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유독 강하다.

남유럽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다. 이탈리아는 2019년 G7 국가 중 최초로 일대일로에 참여했지만, 2023년 탈퇴를 결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리스도 중국 기업 코스코가 운영하는 피레우스 항만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어, 급진적 변화에는 소극적이다.

한-EU 협력의 새로운 기회: 반도체에서 배터리까지

EU의 디리스킹 전략은 한국에게 전례없는 협력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정치 체제와 가치를 공유하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의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의 유럽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목받고 있다. EU는 첨단 메모리 반도체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독일 드레스덴에 17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 건설을 검토 중이며, SK하이닉스도 동유럽 지역에 생산기지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EU의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임을 시사한다.

배터리 분야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에 이어 헝가리에도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건설했고, SK온도 헝가리와 체코에 생산기지를 확대하고 있다. 삼성SDI는 헝가리 공장을 중심으로 유럽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 배터리 3사의 유럽 투자 규모는 총 200억 달러를 넘어서며, 이는 EU의 배터리 공급망 다변화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자동차 분야에서도 한국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체코에 전기차 전용 공장 건설을 발표했고, 기아는 슬로바키아 공장에서 유럽 시장용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다. 중국 전기차에 대한 관세 부과로 유럽 시장에서 한국 전기차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상황이다.

조선 분야에서는 친환경 선박 기술을 중심으로 한 협력이 확대되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EU의 그린딜 정책에 부합하는 암모니아 추진선, 수소 연료전지선 등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유럽 조선사들과의 기술 협력이 활발하다. 특히 덴마크, 노르웨이 등 해운 강국들과의 파트너십이 주목받고 있다.

공급망 협력의 제도화: FTA에서 경제안보 파트너십까지

한-EU 간의 경제 협력은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서 정부 간 제도적 협력으로 발전하고 있다. 2023년 체결된 ‘한-EU 전략적 파트너십 업그레이드’ 협정에는 공급망 안보, 디지털 전환, 그린 트랜지션 등의 분야에서 협력 강화 조항이 포함되었다. 이는 기존의 FTA가 단순한 무역 자유화에 그쳤다면, 이제는 경제 안보를 중시하는 새로운 형태의 협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공급망 회복력 파트너십’의 구축이다. 한국과 EU는 핵심 원자재, 반도체, 배터리 등의 분야에서 공급망 정보를 공유하고, 비상시 상호 지원하는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는 중국 의존도 감소와 동시에 한-EU 간 경제적 결속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디지털 분야에서는 ‘디지털 파트너십’을 통해 5G/6G, AI, 양자컴퓨팅 등의 첨단기술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의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유럽의 에릭슨, 노키아 등과 6G 기술 개발에 공동 참여하는 것이 그 예다. 또한 양국은 중국의 기술 패권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 주권’ 확보 방안을 공동으로 모색하고 있다.

그린 트랜지션 분야에서도 협력이 활발하다. 한국의 수소 기술과 EU의 그린 수소 생산 능력을 결합한 ‘그린 수소 밸류체인’ 구축이 추진되고 있다. 특히 북해의 해상풍력과 한국의 수소 저장·운송 기술을 연계한 프로젝트가 주목받고 있다. 이는 러시아 가스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EU와 수소 경제 선도국을 목표로 하는 한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분야다.

중국의 반발과 대응 전략

EU와 한국의 협력 강화에 대한 중국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EU의 반보조금 조사에 대해 WTO 제소로 맞대응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특히 한국 기업의 중국 내 사업에 대한 각종 규제와 조사가 늘어나고 있어,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도 EU와 한국을 완전히 적대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중국 경제가 여전히 유럽과 한국 시장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고, 특히 고부가가치 제품과 기술 도입에서는 양국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선별적 보복’을 통해 압박의 강도를 조절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중국의 대응에서 주목할 점은 ‘자력갱생’ 정책의 강화다. 외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자체 기술 개발에 더욱 집중하고 있으며, 일대일로 등을 통해 대안 시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해 서방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과 EU는 이러한 중국의 대응에 대비해 공동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WTO 등 다자기구에서의 공조를 강화하고, 제3국에서의 협력 사업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인프라 사업이나 아프리카에서의 개발 협력 등이 그 예다.

미래 전망: 지속가능한 디리스킹을 위한 과제

EU의 디리스킹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는 경제적 비용의 문제다. 중국과의 관계를 줄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기적 비용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특히 독일 등 중국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의 경제적 부담을 어떻게 분산시킬 것인지가 중요하다.

둘째는 대안 공급망의 안정성이다.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공급처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공급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일본, 대만 등 기술 파트너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인도, 멕시코 등 생산기지 다변화가 필요하다.

셋째는 기술 격차 유지의 어려움이다. 중국의 기술 추격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우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AI, 양자컴퓨팅 등의 분야에서는 중국이 일부 영역에서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어, 단순한 기술 이전 차단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넷째는 글로벌 사우스의 중립화 문제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미-중 패권 경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려 하고 있어, EU와 한국의 디리스킹 전략에 적극 동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 국가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인센티브 체계가 필요하다.

결론

EU의 대중 디리스킹 전략은 탈냉전 이후 30년간 지속된 경제적 상호의존을 전제로 한 국제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더 이상 경제적 효율성만으로는 국제 협력의 방향이 결정되지 않으며, 정치적 신뢰와 가치 공유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반보조금 조사, 공급망 다변화, 투자심사 강화 등을 통해 구현되는 이러한 전략은 단순한 보호주의와는 다른, 선택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다.

한국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경쟁력과 민주적 가치를 공유하는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서, 한국은 EU의 디리스킹 전략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조선 등의 분야에서 이미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향후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러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단순히 중국의 빈자리를 메우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EU와 함께 새로운 글로벌 가치사슬을 구축하는 주도적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특히 디지털 전환과 그린 트랜지션이라는 두 가지 메가트렌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한국의 기술력과 EU의 시장이 만날 때, 진정한 시너지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도 신중하게 관리해야 한다. 완전한 탈중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한국 경제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따라서 EU의 디리스킹 전략에 동참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독자적인 균형점을 찾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한국이 지정학적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결국 EU의 디리스킹 전략은 단순한 경제 정책을 넘어서 21세기 국제질서의 재편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경제 안보가 국가 안보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기술 패권 경쟁이 지정학적 갈등의 새로운 축이 되는 시대에서 한국과 EU의 협력은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시장경제 원칙을 지켜나가는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다. 이러한 협력이 성공한다면, 중국의 일방적 부상에 맞서는 균형추 역할을 하면서도 글로벌 경제의 안정성과 혁신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