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공동농업정책 개편과 지속가능 농식품 체계 전환: 농가소득 지원에서 생태축으로의 전환이 가져온 갈등과 기회

유럽연합의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 CAP)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1962년 출범 이후 60년간 유럽 농업의 근간이었던 CAP는 단순한 농가소득 지원 정책에서 벗어나 기후변화 대응과 생물다양성 보전을 핵심으로 하는 지속가능 농식품 체계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EU 예산의 약 32%를 차지하는 CAP의 근본적 성격 변화를 의미하며, 유럽 농업뿐만 아니라 글로벌 농식품 시스템에도 큰 파급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60년 CAP 역사상 가장 큰 변화

2023년부터 시행된 새로운 CAP는 ‘그린딜(Green Deal)’과 ‘농장에서 식탁까지(Farm to Fork)’ 전략의 핵심 실행 수단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농업환경기후제도(AECM)의 대폭 확대다. 기존 CAP에서 농가는 단순히 토지를 소유하고 기본적인 환경 기준만 지키면 직불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CAP는 농가가 적극적으로 환경보전 활동에 참여해야만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바뀌었다.

구체적으로 전체 CAP 예산의 25% 이상을 생태제도(eco-schemes)에 할당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는 연간 약 480억 유로에 해당하는 규모다. 농가들은 탄소격리, 생물다양성 증진, 토양건강 개선, 수질보전 등의 활동을 수행해야 하며, 이에 대한 성과를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단순히 화학비료 사용량을 줄이는 것을 넘어서 구체적인 환경 성과를 달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회원국별로 CAP 전략계획을 수립하도록 한 것도 중요한 변화다. 과거에는 EU 차원에서 일률적인 정책을 적용했지만, 이제는 각국의 농업 현실과 환경 조건에 맞는 맞춤형 정책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은 유기농업 확대에, 프랑스는 탄소농업에, 네덜란드는 정밀농업에 각각 중점을 두는 식으로 차별화된 접근이 가능해졌다.

농가들의 격렬한 반발과 현실적 어려움

새로운 CAP에 대한 농가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2023년과 2024년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농민 시위는 이러한 갈등의 단면을 보여준다. 네덜란드에서는 질소배출 규제 강화에 반발하는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헤이그 시내로 진입했고, 독일에서는 농업용 경유 보조금 삭감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농민들은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입으로 인한 가격 하락과 환경 규제 강화의 이중고를 호소하며 정부 청사 앞에서 농산물을 쏟아붓기도 했다.

농가들의 불만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복잡한 행정절차다. 환경보전 활동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독일의 한 농가는 “농사짓는 시간보다 서류 작성하는 시간이 더 많다”고 하소연했다. 둘째는 추가 비용 부담이다. 유기농 전환이나 정밀농업 도입을 위해서는 상당한 초기 투자가 필요하지만, 정부 지원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시장 경쟁력 우려다. 환경 기준을 지키느라 생산비가 늘어나는데 EU 역외에서 수입되는 저가 농산물과 경쟁해야 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특히 소규모 가족농의 어려움이 크다. 프랑스 농업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30헥타르 미만 소농의 70%가 새로운 환경 기준 준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대규모 농장은 전문 컨설턴트를 고용하거나 디지털 농업 시스템을 도입할 여력이 있지만, 소농들은 개별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농장 규모의 양극화가 더욱 심화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환경단체와 시민사회의 압력

농가들의 반발과 대조적으로 환경단체들은 CAP 개편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유럽환경청(EEA)은 현재의 개편 속도로는 2030년 기후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경고했다. 농업 부문은 EU 온실가스 배출량의 10.3%를 차지하지만, 감축 속도가 다른 부문에 비해 현저히 느리다는 지적이다.

버드라이프 인터내셔널, 그린피스, WWF 등 주요 환경단체들은 “CAP 개편이 그린워싱에 그치고 있다”며 더 강력한 환경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축산업의 메탄 배출과 집약적 농업으로 인한 생물다양성 손실 문제를 제기한다. 유럽의 농지에서 서식하는 조류 개체수는 지난 30년간 25% 감소했고, 곤충 개체수는 더욱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시민사회의 압력도 만만치 않다. 유럽시민이니셔티브 ‘꿀벌과 농민을 구하자(Save Bees and Farmers)’는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농약 사용량 50% 감축과 생태농업 확산을 요구했다. 독일에서는 ‘우리는 지긋지긋하다(Wir haben es satt!)’ 캠페인이 매년 수만 명의 시민들을 베를린 거리로 불러모으며 지속가능한 농업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의식 변화도 중요한 동력이다. 유로바로미터 조사에 따르면, 18-34세 유럽인의 76%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농업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들은 단순히 저렴한 식품보다는 환경친화적이고 윤리적으로 생산된 식품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유기농 식품 시장은 연평균 8% 성장하고 있으며, 공정무역 인증 제품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지역별 차별화된 대응 전략

CAP 개편에 대한 회원국들의 대응은 각국의 농업 구조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독일은 ‘미래농업전략 2030’을 통해 디지털 농업과 정밀농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농장 관리 소프트웨어 도입 비용의 70%를 지원하고, 드론과 센서를 활용한 스마트팜 기술 개발에 연간 5억 유로를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프랑스는 ‘탄소농업’ 개념을 앞세워 농업을 기후변화 해결책으로 전환하려 한다. 토양에 탄소를 저장하는 농법을 개발하고, 이를 탄소시장과 연계하여 농가에게 추가 수익을 제공하는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2030년까지 프랑스 농업을 탄소중립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했다.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집약적인 농업 시스템을 운영해왔지만, 질소 오염 문제로 인해 근본적 전환을 강요받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가축 사육 규모를 30% 줄이고, 대신 고부가가치 스마트팜과 수직농장 기술 개발에 집중하기로 했다. 논란이 많지만, 장기적으로는 농업의 디지털 전환을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동유럽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접근을 보인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소농 보호를 명분으로 환경 기준 적용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농업 구조는 여전히 소규모 가족농 중심이며, 서유럽에 비해 기술 도입이 늦어 새로운 기준 적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EU 기금을 활용한 농업 현대화 사업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향후 몇 년 내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글로벌 농식품 시스템에 미치는 파급효과

EU의 CAP 개편은 역내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농식품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농산물 무역 패턴의 변화다. EU가 환경 기준을 강화하면서 역외 농산물에 대해서도 동일한 기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상 그린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EU는 삼림벌채와 연관된 농산물(팜오일, 대두, 쇠고기, 코코아 등)의 수입을 제한하는 ‘삼림벌채 방지 규정’을 2024년 말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이로 인해 브라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주요 농산물 수출국들이 생산 방식을 바꾸거나 대체 시장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브라질 정부는 이미 아마존 보호 정책을 강화하고 지속가능한 농업 인증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기회와 도전이 공존한다. EU의 엄격한 환경 기준은 아프리카 농산물 수출에는 장벽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유기농이나 지속가능한 농업 방식을 도입한다면 프리미엄 시장에 진출할 기회가 된다. 가나의 코코아나 케냐의 커피처럼 이미 친환경 인증을 받은 농산물들은 EU 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받고 있다.

기술혁신이 가져온 새로운 가능성

CAP 개편은 농업 기술혁신을 크게 촉진하고 있다. 유럽투자은행(EIB)은 농업 기술 개발에 향후 10년간 100억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이는 과거 투자 규모의 5배에 해당한다. 특히 정밀농업, 대체단백질, 수직농장 등 새로운 농업 기술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정밀농업 분야에서는 인공위성과 드론을 활용한 작물 모니터링 시스템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독일의 BASF는 AI 기반 농장 관리 플랫폼 ‘xarvio’를 통해 농가들이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만 비료와 농약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시스템을 사용하는 농가들은 평균적으로 화학비료 사용량을 20-30% 줄이면서도 수확량을 유지하고 있다.

대체단백질 분야의 발전도 눈부시다. 네덜란드의 Mosa Meat는 세계 최초로 배양육 버거를 개발했으며, 핀란드의 Solar Foods는 공기 중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단백질을 생산하는 기술을 상용화했다. 이러한 기술들은 축축업의 환경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수직농장과 도시농업도 급성장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PlantLab은 LED 조명을 이용한 실내농장에서 기존 농업 대비 95% 적은 물과 99% 적은 농약을 사용하면서도 단위면적당 200배 높은 수확량을 달성하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시 정부가 도시농업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하여 도심 곳곳에 수직농장과 옥상농장이 들어서고 있다.

소비자 행동 변화와 새로운 시장 기회

CAP 개편은 소비자 행동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유럽 소비자들은 점점 더 식품의 생산 과정과 환경 영향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독일의 경우 유기농 식품 시장 규모가 연간 150억 유로에 달하며, 전체 식품 시장의 6.4%를 차지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각각 130억 유로, 45억 유로 규모의 유기농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젊은 소비자들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기존 세대에 비해 식품 구매 시 환경과 윤리적 요소를 2배 이상 중요하게 고려한다. 이들은 플랜트 베이스(식물성) 식품, 로컬푸드, 제로웨이스트 포장 제품을 선호하며, 이를 위해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한다.

이러한 소비 트렌드 변화는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 덴마크의 ‘Too Good To Go’ 앱은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식당과 상점의 남은 음식을 할인 판매하는 서비스로 유럽 전역에서 5천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네덜란드의 ‘Picnic’은 전기차를 이용한 친환경 식료품 배송 서비스로 급성장하고 있다.

한국 농업에 주는 시사점

EU의 CAP 개편은 한국 농업 정책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한국도 205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농업 부문의 환경 부담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업·농촌 탄소중립 추진전략’을 발표하고 스마트팜 확산, 저탄소 농법 보급, 바이오에너지 활용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EU에 비해서는 아직 초기 단계다.

특히 한국은 농업 구조상 소규모 가족농이 대부분이어서 EU의 경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독일과 프랑스가 소농 지원을 위해 도입한 협업 시스템이나 네덜란드의 농업 클러스터 모델 등은 한국 상황에 적용 가능한 방안들이다. 또한 농업 분야 디지털 전환을 위한 정부 지원 정책도 EU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수 있을 것이다.

한EU FTA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EU가 환경 기준을 강화하면서 한국 농산물 수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 농가들도 EU 시장 진출을 위해서는 유기농 인증이나 지속가능성 인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이를 위한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결론

EU의 공동농업정책 개편은 단순한 정책 변화를 넘어 농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농업을 환경파괴의 주범에서 기후변화 해결책으로 바꾸려는 이 시도는 많은 갈등과 도전을 수반하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도 창출하고 있다. 농가들의 반발과 환경단체의 압력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지만, 기술혁신과 시장 변화가 이러한 전환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유럽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글로벌 농식품 시스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정책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도 이러한 글로벌 트렌드에 맞춰 농업 정책의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EU의 경험은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