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1. 한국 헌법사 개관 – 제헌헌법부터 2024년 개정 논의까지의 헌정사 변천과정

한국의 헌법사는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걸어온 파란만장한 여정이다. 1948년 제헌헌법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76년간 우리 헌법은 9번의 개정을 거쳐 왔고, 지금도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춘 개헌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헌정사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해왔는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제헌헌법의 탄생과 초기 헌정 질서

해방 이후 헌법 제정의 배경

1945년 광복과 함께 우리나라는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역사적 과제에 직면했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근대적 헌정 경험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헌법 제정 작업이 시급했다. 당시 좌우 이념 대립과 분단 상황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는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1948년 제헌헌법의 특징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1948년 제헌헌법은 대한민국 헌정사의 출발점이다. 이 헌법은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기본권 보장을 핵심 원리로 설정했다. 특히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회권 규정들을 포함시켜 균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 근로의 권리와 의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등을 명시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중심제를 택했지만, 국무총리제를 두어 의원내각제적 요소도 일부 가미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하도록 했는데, 이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을 고려한 측면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기 헌법 개정과 권위주의 체제로의 변질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1952년 1차 개헌(발췌개헌)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고, 1954년 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에서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했다. 특히 사사오입개헌은 가결에 필요한 재적의원 3분의 2에 1명이 부족한 상황에서 203.3명을 204명으로 반올림해서 통과시킨 것으로, 헌정사상 가장 논란이 된 개헌이었다.

헌정 질서의 파괴와 4.19 혁명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는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절정에 달했다. 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4.19 혁명으로 분출되었고, 결국 이승만은 하야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헌법과 법치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온 국민이 깨닫게 되었다.

제2공화국과 의원내각제 실험

3차 개헌과 민주주의 복원

4.19 혁명 이후 1960년 6월에 단행된 3차 개헌은 이승만 독재의 폐해를 반성하며 대통령제를 포기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했다. 대통령은 상징적 국가원수로, 국무총리가 실질적 행정수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또한 양원제 국회를 구성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강화했다.

제2공화국의 한계와 5.16 군사정변

하지만 제2공화국은 정치적 혼란과 사회 동요 속에서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이 격화되고, 야당 간 분열로 정국이 혼미해지면서 1961년 5.16 군사정변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는 민주주의가 단순히 제도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으며, 정치 문화와 시민 의식의 성숙이 함께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박정희 정권과 개발독재 체제의 헌법적 뒷받침

4차, 5차 개헌과 대통령제 복귀

박정희 정권은 1962년 4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중심제를 부활시켰다.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강력한 행정부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1969년 5차 개헌에서는 대통령 3선을 허용하여 박정희의 장기집권 기반을 마련했다.

유신헌법과 독재 체제의 완성

1972년 6차 개헌인 유신헌법은 한국 헌정사상 가장 반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된다.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선출하고, 중임 제한을 없애며, 국회 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또한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정회 의원으로 채우도록 했다.

유신체제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킨 권위주의 체제였다.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이 심각하게 제약되었고, 긴급조치를 통해 헌법조차 무력화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제5공화국과 전두환 정권의 헌정 운영

7차, 8차 개헌과 신군부 집권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한 후, 짧은 민주화의 봄이 있었지만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거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1980년 7차 개헌과 1980년 8차 개헌을 통해 제5공화국 헌법이 만들어졌다.

제5공화국 헌법의 특징과 한계

제5공화국 헌법은 겉으로는 유신헌법보다 민주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히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고,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유지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초헌법적 기구를 두어 헌법 개정 없이도 법률 제정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 시기에도 언론 통폐합, 학원 자율화 조치 철폐, 야간통행금지 등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조치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함께 시민 사회가 성장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함께 커져갔다.

6월 항쟁과 민주화의 성취

1987년 6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

1987년 6월 항쟁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적 시위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민주화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시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굴복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9차 개헌과 현행 헌법의 탄생

1987년 9차 개헌으로 현행 헌법이 만들어졌다.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고 임기는 5년 단임으로 정해졌다. 기본권 보장이 대폭 강화되었고, 헌법재판소가 신설되어 위헌법률심판, 헌법소원 등을 통해 기본권 보호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이 헌법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권력 분산과 견제 장치를 대폭 강화했다. 국정감사권,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 건의권,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제도 등이 그 예다.

민주화 이후 헌정 발전과 새로운 과제들

문민정부와 헌정 질서의 안정화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으로 문민정부가 시작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발전했다. 하나회 숙청, 12.12와 5.18에 대한 재판, 금융실명제 실시 등을 통해 과거 권위주의 잔재를 청산하려 노력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는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민주주의가 더욱 공고화되었다.

21세기 새로운 헌정 과제들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는 급속한 변화를 경험했다.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 저출산·고령화, 사회 양극화, 남북 관계 변화 등 새로운 사회적 과제들이 등장했다. 이에 따라 헌법도 시대적 요구에 맞게 개정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디지털 기본권, 환경권 강화, 지방분권 확대, 권력구조 개편 등이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이원정부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헌안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국민적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최근의 개헌 논의와 2024년 현재 상황

문재인 정부의 개헌 시도

문재인 정부에서도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2018년에는 대통령 4년 중임제, 지방분권 강화, 기본권 확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발의되었지만, 정치권의 이견으로 무산되었다. 당시 자유한국당이 개헌 논의 자체를 거부하면서 국민적 공론화 과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2024년 현재의 개헌 논의

현재도 개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본권 신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환경 조항 강화,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상황에서의 기본권 제한 근거 마련 등이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저출산·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한 헌법적 근거 마련,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지방분권 확대, 정치 개혁을 위한 권력구조 개편 등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국민적 합의 부족으로 실질적인 개헌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론

한국 헌법사 76년은 민주주의를 향한 험난한 여정이었다. 제헌헌법에서 시작된 헌정 질서는 독재와 민주화를 반복하며 점진적으로 발전해왔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쟁취한 현행 헌법은 한국 민주주의의 소중한 성취물이다.

하지만 헌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함께 진화해야 하는 살아있는 문서다. 급변하는 21세기 환경에 맞춰 우리 헌법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할 때가 왔다. 중요한 것은 개헌이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닌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헌정사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미래 세대에게 더 나은 헌정 질서를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헌법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지혜를 얻는 일이기도 하다.